아침저녁으로 제법 찬 기운이 일어서는 시월의 끝무렵이면 포도 위를 나뒹구는 메마른 엽편과 그 엽편을 지탱하고 있는 몇 가닥의 엽맥 위에서 나는 나를 떠나간 여자의 마지막 사진 속에 찍혔던, 흑진주처럼 검고 단단한 별리의 마침표를 보게 됩니다.
흡사 그 여자의 간결하고도 단호했던 끝인사처럼 엽맥의 가장이에 선 하나의 마침표가 이제 가을의 출구를 밝히는 화살표로서 나에게 다가섭니다. 가을바람에 실려 왔던 그녀와 나와의 겨울을 겨냥한 단 몇 줄의 사연, 그 행간의 배면에 젖어 있던 그녀의 짙고 짙은 한숨 소리를 다시 들으며 동시에 나는 그녀의 한숨을 나의 것으로 나의 기도에다 불러들입니다.
시월의 끝무렵 찬 바람이 일면 내 가슴 속에 숨어 앉았던 공동들도 마침내 몇 장의 낙엽이 되어 앓고 있는 나의 몸뚱이를 쉽게 빠져나갑니다. 가을은 떠남과 떠나보냄을 함께 담고 있는 그런 계절인 듯싶습니다. 마치 두 얼굴을 갖게 되는 20대의 사내들처럼.
이제 나는 언제나 수동태의 문장만을 싣고 다니는 시월의 바람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가을은 아물어가는 생채기만을 골라서 다시금 그곳에다 열꽃을 피워내는 것인지... 그 뜨거웠던 날들의 잊음과 잊혀짐의 혼돈 속에서 떠나보냈노라고 울먹이던 그날의 일기장에로 그녀를 왜 다시 불러들여 그녀로 하여금 날 한 번 더 버리게 만드는 것일까요.
<나의 뜻대로 할 수 없음>의 문장 속에 갇히게 하는 시월의 끝무렵에서도 나는 여전히 한 마리의 싱싱한 수컷으로 남아 가을날 그녀의 온몸을 감쌌던 실크자락 속의 희미한 속옷의 윤곽을 더듬으며 아직 내 살 속 어느 깊은 곳을 헤매고 있을 그녀의 풋풋한 살내음을 맡아내곤 혼자 몸서리칩니다.
가을은 역시 떠남과 떠나보냄, 잊음과 잊혀짐을 함께 엮는 하나의 주어일까요. 아니면 능동과 수동이 함께 걸린 상투적인 연문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시월의 찬 기운이 일어서면 나는 가을을 앓는 한 마리의 엽충임을 다시 한 번 자각하게 됩니다. 초록빛 날들을 스스로 저버린 지금 그 뜨거웠던 날들의 어리석음을 비로소 깨달으면서나는 한 장의 연서도 간직할 수 없음을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슬픈 생채기가 오롯이 피어나는 여닐곱시의 퇴근 길목에서 시월의 찬바람은 또다시 그녀의 체온을 내 옆구리에 동반시킬게 분명합니다. <도저히 팔목은 낄 수 없음>이라고 응시하던 그녀의 가녀린 손목을 나의 바지 주머니 속에다 꽂아버리는 시월의 속셈. 악마의 시월... 차갑도록 청명한 시월의 하늘 밑을 거닐면서도 그녀의 실크자락 속에 감춘 속옷의 향기만 탐하던 나의 이십육세. 악마의 시월....
이제 시월은 또 다른 시월로 서서, 내 젊은날의 가을은 그 청명한 가을날 무엇을 생각하였으며, ‘어디를 헤매고 있었나’를 차가운 얼굴로 내게 묻고 있습니다.
가을비가 내립니다. 귀밑머리 희끗희끗한 지천명의 나이에 접어들어 막 단풍이 드는 나뭇잎 위로 추적추적 내리는 저 가을비를 온몸으로 맞아봅니다. 채 단풍이 들지도 못하고 투둑투둑 내리는 가을비에 제 생을 다하지 못하고 떨어지는 낙엽이 왜 그리 서글퍼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스물여섯 살 먹었을 때. 오늘처럼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그해 가을,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어디로 다니며, 그 차갑게 내리는 가을비를 맞았을까요.
아픕니다. 가을비 동글동글 이슬방울처럼 맺힌 가로수 단풍잎을 바라보면 그때 목숨을 걸고 사랑했던 한 여인의 얼굴이 자꾸 떠오릅니다. 가슴이 쓰리고 아파 가을비에 온몸을 적셔도 그 여인의 새까만 눈동자가 끝내 지워지지 않습니다.
가을비 내리는 날, 윤재걸 시인의 시를 읽으며 한때 사랑했던 그 여인의 눈동자를 떠올려보는 것도 가을날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만 같습니다. 오늘은 가을비 맞으며 무작정 걷다가 낙엽이 가을비처럼 투둑투둑 떨어지는 어느 찻집에 앉아 깊어가는 가을을 닮은 갈색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