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주막에 나가서
단돈 오천 원 내놓으니
소주 세 병에
두부찌개 한 냄비
쭈그렁 노인들 다섯이
그것 나눠 자시고
모두들 볼그족족한 얼굴로
허허허
허허허
큰 대접 받았네그려!
산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시월이 점점 깊어가면서 이 땅의 산이란 산에는 모두 울긋불긋 물든 고운 잎사귀들로 가득합니다. 가을해도 많이 짧아졌습니다. 요즈음에는 오후 5시 30분쯤만 되면 가을해가 서녘으로 뉘엿뉘엿 지기 시작합니다. 가을해는 지면서 무엇이 그리도 안타까운지 저물어가는 이 세상 곳곳에 피처럼 붉은 노을을 울컥울컥 토해내고 있습니다.
추수가 끝난 빈 들녘에서는 나락 쭉정이를 태우는 푸르스름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문득 어릴 때 코끝을 맴도는 달콤한 내음과 함께 초가집 한 귀퉁이에서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그 저녁밥 짓는 연기가 떠오릅니다. 그랬습니다. 그때에도 내가 살던 마을 곳곳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를 때면 피처럼 붉은 노을이 우리 마을 곳곳을 붉게붉게 적시곤 했습니다.
문득, 어디선가 "허허허/ 허허허/ 큰 대접 받았네그려!"하는 쭈그렁 노인의 구수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마을 앞 목로주점 허름한 탁자 위에 소주 몇 병과 매콤한 두부찌개 한 냄비만 있어도 마을노인들 너댓명 얼굴을 볼그족족하게 물들이며 너털웃음 환하게 웃을 수 있었던 시절, 새삼 그때 그 어린 시절이 너무나 그립기만 합니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갑자기 15여 년 앞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들려옵니다. "니 서울 올라가다가 신작로 주변에 동네 노인들 보이거든 5천 원짜리 한 장만 드려라. 안 받을라 해도 그냥 주머니에 슬쩍 찔러주고 가거라. 소주라도 몇 병 사 드시게"라는 어머니의 당부 같은 그 말씀이 자꾸만 환청처럼 들려옵니다.
지금은 비록 내 고향 마을이 창원시가지 속으로 사라졌지만 15여 년 앞만 하더라도 내가 태어나 자랐던 고향 마을 들머리에는 조그마한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구멍가게는 말 그대로 만물상회였습니다. 아이들의 학용품에서부터 눈깔사탕과 건빵, 뽀빠이를 비롯한 과자류, 콩나물과 두부를 비롯한 여러 가지 반찬거리뿐만 아니라 어르신들의 주막까지 겸하는 그런 가게였습니다.
그 가게에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이 동네 저 동네 어르신들이 들락거렸습니다. 또한 가게 안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 마을의 쭈그렁 노인들이 시커먼 나무 탁자를 마주한 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 나무 탁자 위에는 굵은 왕소금도 놓여 있었습니다. 간혹 조그만 간장접시에 시어터진 김치가 쪼끔 담겨 있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땐 시인의 말처럼 "마을 주막에 나가서/ 단돈 오천 원"을 내놓으면 "소주 세 병에/ 두부찌개 한 냄비"를 시키고도 거스름돈이 넉넉히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술과 안주를 내고 나면 "쭈그렁 노인들 다섯이/ 그것 나눠 자시고/ 모두들 볼그족족한 얼굴로" 이렇게 말합니다. "허허허/허허허/ 큰 대접 받았네그려!"
그랬습니다. 그때 내 어머니께서는 마을노인들의 그런 마음을 미리 읽으시고, 서울로 올라가는 저더러 마을노인들에게 오천 원을 드리고 가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서울로 올라가던 그 날은 별스레 마을노인들이 한 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 어머니의 당부를 끝내 지키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그때 빛바랜 장독대에서 된장과 간장, 된장에 박은 풋고추와 깻잎 등을 꺼내 비닐봉지에 꼭꼭 묶어주시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들녘 곳곳에서 가물가물 피어오르던 그 연기와 가을바람에 흔들리던 그 억새들이 자꾸만 가슴을 칩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전봇대처럼 우뚝 서 계시던 어머니의 긴 그림자를 감싸던 그 붉은 노을이 자꾸만 눈에 밟힙니다.
오늘따라 저 빈 들녘에서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푸르스름한 연기와 바알간 노을에 물드는 억새가 마치 그때 그 쭈그렁 노인들의 볼그족족한 얼굴과 마구 겹쳐져 보이는 것은 웬 일일까요. 가을이 깊어가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지금 내 마음이 바알간 감과 잎사귀를 모두 떨군 저 텅 빈 감나무 가지처럼 쓸쓸하기 때문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