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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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의 시집 ‘농무(農舞)’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
약장수 기타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싯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파장’ 모두 신경림 농무 <창작과비평사>1975. 서울



창작과비평사에서 신경림 시인의 시집 ‘농무’가 처음 발간되었을 1975년 무렵 나는 문학청년이었다.

군사독재의 서슬 푸른 칼날이 언제 목덜미로 내려꽂힐 줄 모르는 그러한 상황에서 용기 있는 일부 문인들 외에는 문학판마저 사람이 사는 모습을 그려내기는커녕 세상을 향하는 바른 말, 옳은 글 한 줄도 쉽사리 뱉을 처지가 아니었다.

그 때, 시집 ‘농무’의 출현은 한 마디로 충격과 기쁨 그 자체였다. ‘농무’에 담긴 시편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생활과 감정의 무늬를 진솔하고 경제적으로 처리하여 보여줌으로써, 한 때 모더니즘이란 이름으로 창궐하던 난삽, 난해한, 내용보다는 기교를, 삶보다는 말의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려는 경향의 시인들의 시를 복귀불능의 지경으로 추문화시켜버렸다.

그의 시는 ‘더럽고 너절하고 고리타분하지만 경험 이외는 어느 한 부분도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내 시작 태도의 지침이 되었으며 실제 신경림 시인의 발문으로 1978년 시인사에서 ‘북소리’라는 시집을 발간, 시인의 대열에 낄 수 있게 되는 영광을 얻었다.

나는 삶의 문제를 보다 선명하게 각인(刻印)하는 작업에 충실할 것이다. 시가 진실로 삶의 표출이라면 한 편의 시는 한 편의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이며. 시를 읽은 독자들의 가슴에 한 편의 소설을 읽은 뒤의 콧등 찡한 느낌으로 파고드는 그런 시를 써 나갈 것이다.

이것이 신경림 시인의 시집 ‘농무’가 내게 준 가장 큰 미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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