댐 속에 묻힌 유년, 금수면 봉두리(金水面 鳳頭里)
댐 속에 묻힌 유년, 금수면 봉두리(金水面 鳳頭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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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시작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봉두리는
댐이 되었다 오오, 물 잠겨 갈 수 없는
전설의 마을, 돌이킬 수 없는 내 아홉 살의
꿈 속, 늦은 삼월에.

('아홉살 먼 전설의 마을'의 마지막 부분)



내가 태어난 곳은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신기(새터)에 있는 월항초등학교 교장 사택에서였다. 이듬해 1950년 6·25민족전쟁을 치렀고, 약관의 나이로 교장이 되신 아버지를 따라 용암면에서 2년, 그리고 금수면 봉두리로 갔다. 그 때 다섯 살. 희미하지만 내 기억은 봉두리(鳳頭里)에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외가가 없다. 어머니는 평양에서 중강진으로 연결되는 만포선의 한 가운데에 있는 소읍인 평안북도 희천(지금은 자강도 희천) 분이시다. 아버지의 첫 발령지였던 심양공립보통학교 한인 교장의 조카였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마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가지 않기 위하여 시집 오셨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패기 없었던 나는 어머니와 성격 면에서 너무 틀렸었고 이런 내가 괄괄했던 어머니 눈에 들 리 없었을 것이다.

그에 반해서 아버지는 매우 평범하면서도 온순한 시골 훈장이셨다. 돈에 대하여 큰 욕심이 없었고, 퇴직 후 집 한 칸 장만하는 능력도 없었다. 주위에게 유년 시절의 어려웠던 기억을 이야기하면 교장 아들로서의 삶이 도대체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곤 한다.

그러나 친할머니와 딸 신행길 따라 내려와 38선에 막혀 못 가신 외할머니, 이렇듯 두 분의 어머니를 잘 모셨으며 비록 가난한 생활 중에서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으시던 꼿꼿한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작은 전율이 온 몸을 흔듦을, 어쨌건 지금의 내 삶을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삶의 연장으로 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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