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 바느질을 하신다
더딘 그믐밤을 촘촘히 기우시려는 듯
호롱불 쌍심지 길게 돋우시고 때론
바늘을 쓱쓱 머리에 문대시면서
사랑채 구들목은 생솔 둥지 찍찍 타고
웃마실 개 짖는 소리 컹컹 가까워 오면
가야산포지서에선
띄엄띄엄 포성이 들렸다 초저녁 나타났다던
빨갱이 쫓나보다
(시-'반짇고리'의 앞부분)
1953년, 그러니까 내 기억은 다섯 살 때부터 시작된다. 아마 그 때까지 전쟁이 끝나지 않았던지 무학리(舞鶴里) 포지서에선 때때로 가야산 쪽으로 펑펑 포를 쏘아댔다.
아버지와 함께 면소재지에 갈 때마다 청홍 비단자락이 감긴 서낭당을 지나 전쟁 때, 마을 주민들이 생매장되었다는 개울을 건너야 했는데 그 곳을 지날 때마다 대낮인데도 머리칼이 쭈뼛거렸으며 되돌아보는 통에 자꾸만 발을 헛디디곤 했다.
지금은 댐 속에 갇힌 금수면 봉두리는 빼어난 절경이 길게 이어진 대가천계곡(大家川溪谷)의 초입부분으로써 계곡으로 맑고 깊게 흐르는 가천(家川)의 합수머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가천은 가천면에서부터 대가천(大伽川)이 돠어 고령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마을의 위쪽에 지어진 봉두초등학교는 콜타르를 칠한 검정 송판때기를 덕지덕지 붙인 학교로써 운동장은 온통 잔돌 투성이었다. 집이라곤 교장사택과 학교 앞 가겟집, 큰 미나리꽝 근처에 두어 채 그것이 전부였다. 낮엔 이름 모를 산새소리, 밤을 온통 들쑤시는 개구리 우는소리에 작은 가슴이 서늘하던 기억이 새롭다.
우리들은 학교 이팝나무 밑
작은 바위에 쪼그리고 앉아
작은 돌멩이 하나씩을 열심히 / 갈고 있었다
어쩌다 실수로
손꾸락 끝에 피가 맺혀도
버드나무랑 은행나무가 노란 이파리를
자꾸자꾸 흘리는 것도
가야산 검은 등성이에서
더 검은 땅거미가 내려와
주위가 횟빛으로 바뀌는 줄도 모른 채
부엉이가 상수리나무 꼭대기에 앉아
부엉부엉 우는 소리에 소스라쳐
필통 딸강거리며 집으로 달려갔지만
(시-'돌구슬'의 앞부분)
학교 옆?내 집이었던 교장사택이 있었다. 뒷산은 소나무, 상수리나무, 졸참나무, 싸리나무가 빼곡이 들어서 있고, 산그늘이 드리운 곳엔 손바닥보다 더 큼지막한 싸리버섯이 수없이 있었다.
이렇게 산을 쏘다니다 실수로 벌집을 건드려 땅벌에게 쏘인 몸에다 간장을 잔뜩 칠하거나, 옻이 올라 엄마가 씹어 온몸이 하얗도록 발라주신 생쌀이 마르면서 조여드는 그 이물감(異物感)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으리라.
가을의 초입, 조무래기 동무들은 학교 언덕빼기 작은 바위 위에서 손가락에 피가 맺히는 줄도 모른 채 돌구슬을 갈았다.
미군 레이션에서 나온 구슬 하나(구슬 속에 프로펠러 모양이 들어 있는 유리구슬 또는 하얀색 사기구슬)만 가지면 최고였던 그 시절에 우리가 가장 좋아했던 놀이는 겨울에는 시멘트 포장지(그 때 우리는 그것을 독가루 종이라고 했으며 빳빳하고 무거워 쉽사리 뒤집어지지 않음)로 만든 딱지치기, 가을에는 졸참나무 열매인 굴밤 따먹기였는데 특히 돌구슬에 맞아 사방으로 흩어지던 굴밤, 즉 도토리를 주머니에 가득 채우던 재미는 지금 아이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환상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