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줄에 걸어 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 밤에 내 동생 오줌 싸 그린 지도
꿈에 가 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주 땅 지돈가?
"빨래줄에 걸어 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 밤에 내 동생/ 오줌 싸 그린 지도". 참으로 읽으면 읽을수록 감칠맛이 새록새록 배어나는 그런 시입니다. 그렇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어릴 때 자다가 이불에 오줌을 싼 부끄러운 기억 하나쯤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런 날 아침이면 만주벌판 같은 지도가 그려진 이불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쩔쩔 매던 그런 기억도 떠오를 것입니다.
"네 이 녀석! 말 만한 녀석이 이불에다 오줌을 싸?"
"제가 싼 기 아이라카이예."
"냉큼 나가서 챙이(키) 쓰고 소금 얻으러 안 갈끼가?"
"그기 아이고 동생이 자다가 오줌을 싼 깁니더."
"저 녀석이 잔머리 굴리는 것 좀 보라카이. 그렇게 잔머리만 살살 굴리는 넘은 나중에 커서 좀팽이밖에 못 된다카이. 실수로 하모 그 실수로 인정할 줄 아는 당당할 사내가 되어야 한다꼬 몇 번이나 말하더노."
그렇습니다. "꿈에 가 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주 땅 지돈가"처럼 노오란 지도가 그려진 이불과 축축해진 아랫도리. 특히 요즈음처럼 땡추위가 매서운 동지섣달 아침이면 정말 기분이 묘합니다. 창피하다고 그냥 주저앉아 엉엉 울 수도 없고, 괜히 부끄럽고 어이가 없어 히죽히죽 웃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분명 어젯밤 내가 오줌을 싼 게 분명한 데도 나는 애써 내가 한 짓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한 이부자리에서 같이 잠을 잔 동생에게 은근슬쩍 떠넘깁니다. 같이 아랫도리가 축축해진 애꿎은 동생은 어리둥절하기만 합니다. 그렇게 억지를 자꾸 쓰다 보면 동생은 그냥 엉엉 울어버립니다. 왜냐구요? 동생 또한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정말 자기가 오줌을 싼 것처럼 여겨지니까요.
"이 녀석! 어젯밤에 또 오줌을 쌌구나."
"아… 아입니다. 어…엄마가 소금이 떨어졌다고 해서."
"그으래? 옛다, 여기 있다. 요 녀석아."
"소금만 주시면 되지, 꿀밤은 왜 먹입니꺼?"
저도 어릴 때 이불에 오줌을 싼 때가 더러 있었습니다. 제 어머니께서는 저와 동생이 이불에 오줌을 싸면 챙이(키)를 씌우고 소쿠리를 들려 이웃집에 가서 소금을 얻어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꼴사나운 모습으로 이웃집에 소금을 얻으러 가면 이웃집 아주머니께서는 키득키득 웃으시며 굵은 왕소금을 한 됫박 소쿠리에 담아주곤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오줌을 싸지 말라는 듯이 머리에 꿀밤을 한 대 먹였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제가 이불에 오줌을 싸지 않았는데도 이웃집에 가서 소금을 얻어오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오줌을 쌌을 때처럼 챙이는 쓰지 않았지요. 그때 저는 어머니의 그런 심부름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웃집에 가서 소금을 얻어오는 것은 이불에 오줌을 싼 아이들만이 하는 짓거리였기 때문입니다.
"옴마! 오늘 아침에는 이불에 오줌을 싸지 않았는데도 와 또 김산댁에 가서 소금을 얻어오라고 하노?"
"너거들 좋아하는 맛있는 시래기 된장국을 끓이다가 간을 맞출라꼬 본께네 갑자기 소금이 떨어졌뿟다 아이가. 퍼떡 갔다 온나. 챙이로 안 쓰고 소금을 얻으러 간께네 동네 사람들이 니 보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끼다."
"에이~ 씨! 동생한테 시키모 안 되것나?"
"니 동생은 안주(아직) 코흘리개 얼라(어린 애) 아이가."
흔히, 윤동주 시인 하면 대부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로 시작하는 '서시'를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시대를 살았던 시인의 눈은 그렇게 한 곳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다. 시인은 어떤 대상을 보고 주어진 현실에 맞추어 시로 만들어내는 언어의 마술사이니까요.
윤동주 시인은 이 짤막한 '오줌싸개 지도'란 시에서, 일제의 강압으로 빼앗긴 우리 조국에서 살아가는 우리 민초들의 깊은 슬픔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시에 나오는 아이의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을 벌러 만주벌판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조국의 해방을 위해 독립투쟁을 하기 위해 만주벌판으로 간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아이는 돌아가신 어머니와 만주벌판에 계신 아버지가 너무나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처한 현실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시인은 그러한 아이의 애타는 심정을, 아이가 자신도 모르게 이불에 싼 오줌을 통해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이가 싼 그 오줌이 이불에 그려낸 만주 땅 지도에서 아이의 부모님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