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캐가 지금 달을 잡아 묵고 있는 것이여
오랑캐가 지금 달을 잡아 묵고 있는 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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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오랑캐

아가 오랑캐가 달을 잡아 묵는구나
월식날 마루에 앉아
어머니 심란한 표정으로 하시는 말씀

엄니도 오랑캐가 어디 있어요
저걸 월식이라고 허는 거여요

월식이 뭐시다냐
옛날부터 오랑캐가 달을 잡아 묵는다고 했는디

우리가 사는 땅덩어리가 해를 가려 생긴 그림자 속에
달이 들어가는 것을 월식이라고 해요 엄니

맑은 물 떠다가 거울 담그고
거울에 비친 달 한 번 봐라
오랑캐가 안 보이는가

세숫대야에 갓 길어 올린 물 채우고
잠긴 손거울에 비친 달을 봤더니
달 보이지 않고 무지개 하나 떠 있네

엄니 엄니 뭔 일이데요
달은 어디 가고 무지개만 보이네요

무지개 같이 이쁜 탈을 쓴
그놈이 바로 오랑캐니라
그 오랑캐가 지금 달을 잡아 묵고 있는 것이여



지리산에 다녀왔습니다. 산수유 꽃으로 잘 알려진 구례군 산동면, 지리산 온천이 있는 관산리라는 마을에 소의제가 있는데 '작은 의리도 져버리지 않는 집'이라는 뜻이라네요.

서울 교육대학교에 다니다가 1987년 2월 20일 군사독제 정권의 탄압에 항거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박선영 열사의 부모님이 열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소의제라는 기념관을 세워 지키며 생활하고 계시는 곳입니다.

해마다 전국 노동자문학회(전노문) 대동제가 열리는데 올해는 구례 소의제에서 열린다고 해서 일 끝나고 저녁에 노동자문학을 하는 동지들과 후배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갔습니다.

전노문 회원들은 앞날인 7월 15일부터 와 있었습니다만 비가 오거나 일거리가 없어서 자주 일이 끊기다가 모처럼 일거리가 있는데 일을 팽개치고 갈 수가 없어서 일을 하고 저녁에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장이나 회사, 학교에 다니는 노동자들은 일요일이나 공휴일이 있어서 그 날짜에 맞추어 행사를 계획하고 열지만 우리 같은 공사장 노동자들은 일거리에 따라서 일을 하거나 쉴 수밖에 없으니 행사에 아예 빠지거나 밤 시간을 이용하는 수 밖에요.

소의제를 찾아간 7월 16일은 음력 유월 보름날이었습니다. 온 나라에 개기월식이 있는 날이었지요. 밤 8시가 지나면서 월식이 시작되어 자정 무렵 월식이 끝났습니다.

전노문 회원들은 회의를 한다고 방에 모여있고 정식 회원이 아니지만 여러 인연들로 행사에 같이하는 소설가 이인휘, 시인 김기홍, 박남준, 이원규, 문동만, 김용만, 나 이렇게 몇 사람과 박선영 열사의 부모님은 마당에 앉아 술잔을 앞에 두고, 노래도 부르고 하면서 달이 먹히고 다시 토해져 나오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옛날 내가 어렸을 때 월식이 있는 날이면 어른들은 오랑캐가 달을 잡아먹는다고 했습니다. 월식이 있는 밤이면 어머니는 세숫대야에 맑은 물을 떠다 놓으시고는 그 물에 거울조각을 담그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달을 먹는 오랑캐가 보인다는 것이지요. 정말로 세숫대야에 담긴 물속의 거울에는 달만한 무지개가 떠오르고는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 무지개를 오랑캐라고 하셨어요.

오랑캐-

해마다 얼음이 녹는 봄이 오면 북쪽에서 우리나라를 쳐들어왔다는 오랑캐는, 무지막지하게 달까지도 잡아먹는다는 오랑캐는 눈으로 보기에는 아름다운 무지개였습니다. 온 나라의 정신이 통째로 잡아먹히는지도 모르고 무지개처럼 호화찬란한 외국문화에 넋이 빠져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달을 잡아먹었던 오랑캐가 그 뜨거움에 놀라 다시 달을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네요. 우리나라를 쉽게 보는 외국 오랑캐들이 뜨거움에 혼비백산하도록 지금부터라도 우리문화의 불길을 활활 지펴야겠다고, 소의제 마당에서 달이 잡아먹힌 유월 보름날 밤에 다짐을 새롭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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