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외양간 터 어른거리는 참대 숲 그늘 어둡고
진종일 배고픈 솔개 한 마리 휘휘 휘돌던 앞산
그 등성이에 달떴다 군불을 넣었던가 생솔 등걸
타다 만 연기 뜰에 자욱했다
어슬 무렵 내내 산자락 올려다봤다
흔들리는 대숲 그리메 바스락이는 들쥐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랐다 야아, 이놈아야 그믐밤에나 오지
그믐밤에나 오지, 어흠어흠 가래 그렁이며
헛기침도 해댔다 할아범 뒷짐진 손이 무거웠다
솔개그늘이 잠시 집을 스쳤다
대숲이 흔들렸던가 장지문 잽싸게 열렸던가
나직이 이어지던 흐느낌도 잠시, 부엌 빚장둔테
바투 쥐었던 할멈 손에 힘이 풀렸다
어이어이 이 꽃철에 참꽃 같은 내 새끼야아
참꽃 같은 내 새끼야아
대숲 건너 수런거림들이 긴 여운을 남겼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이내 불길한 소문 내리고 다닥다닥 산비탈 마실은
온통 죽음뿐이었다 영문모를 주검들이
골짝을 메우고 그해 여름 장마비는 통곡이었다
겨울 흩날리던 눈발까지도
소문은 오래오래 골짜기에 머물렀다
아직도 그 소문을 나는 모른다
어이어이 참꽃 같은 내 새끼야아
그 밤 참꽃 길 재재발리 돌아 간 그림자는
다람쥐였다 그림자는 늙은 내외의 희망이었다 그래
그는 애지중지 둘째 놈이었다 봄날마다 지천에
흐드러지던 환생의 붉은 참꽃이었다
먼 전장을 돌아 큰형이 싸리 삽작을 들어왔지만
둘째 따라가 늙은 내외는 전설이 되었다 꽃산을 헤매다
지쳐 떠난 툇마루엔 빛 바랜 이등중사 계급장 하나
적막은 마흔 여섯 해 빠른 세월을 몰아갔다
참대 밭 건너 산등성은 또 붉은 참꽃 피고 배고픈
솔개 한 마리 휘휘 돌았다
아직도 나는 그 마을 이름을 모른다
불길한 소문의 마을, 마을은 소백산맥 자락에 붙어
무너질 듯 흐느끼며 떨고 서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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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참꽃'을 위한 변명
고향에서 경남으로 자리를 옮긴 8년 동안 통영 사량도 양지국민학교, 미륵도 연명국민학교, 그리고 모든 교사들이 입성하기를 원했던 마산의 월성국민학교 등 여러 곳을 전전했다. 뿌리도 없었을 뿐 아니라 남은 뿌리마저 부실했던 날들을 스스로 힘들게 몰아넣었던 것 같아 지금도 겸연쩍은 웃음으로 기억을 대신하곤 한다.
그 때 나를 미치게 만든 것이 싸락눈 내리는 1951년 음력 정월초, 믿었던 우리의 국군이 거창군 신원면 과정리 박산골, 대현리 외탄량골짜기에서 나흘동안 752명의 양민을 학살하여 불태워버린 거창양민학살사건이었다.
무슨 의리의 사나이도 아니고 역사를 발굴하기 위하여 애를 쓰는 사학자도 아닌 마당에 건드리면 때로는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시대에 국군의 양민학살사건을 손대다니, 그것도 초등학교 교사의 입장에서.
정말 미친 짓이었다. 방학 때마다 자료를 수집하기 위하여 정말 많은 돈과 열정을 투자했다. 거창의 거의 모든 여관 술집을 섭렵했으며 빨치산의 루트를 찾아 신원면 부근의 소룡산, 바랑산, 보록산, 감악산 등을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을 뿐 아니라 입을 닫은 유가족들의 구술을 받아내기 위하여 힘겨운 싸움을 계속했다.
그때 거창의 작은 학교 교사로 지금은 중견시인으로 열심히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진주의 오인태 시인에게 적잖이 진 신세는 두고두고 갚아야겠지만.
어차피 시작한 일 단숨에 끝내야겠다는 생각으로 1986년 경남대학교 학보사 기자들을 꼬셔서(?) 거창의 궁벽한 산골인 신원면을 샅샅이 뒤졌다(뒤에 경남대학보에 특집으로 수회에 걸쳐 연재되었으며 양민학살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한 물꼬를 트는데 크게 기여하였음). 합동묘소에 비스듬히 묻혀있는 돌비석을 손으로 후벼파서 찍은 사진에서 하늘 쪽으로 뻗은 참으로 알 수 없는 푸른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거창으로 뿌리를 옮길 결심을 하는데 그리 큰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다만 완강하게 산골 행을 거부하는 아내를 달래기 위하여 애를 쓴 일 말고는, 그리하여 1988년 한창 서울올림픽 준비에 온 세상이 떠들썩할 때 나는 거창으로 가는 이삿짐 차에 몸을 실었다.
그 후 들은 바로는 1987년 발간되어 국군모독죄(?)가 되어버린 시집 '베트남 내가 두고 온 나라' 사건 때문에 벽지학교로 좌천되었다고들 했고 가 닿은 거창에서는 마산에서 내쫓긴 온 문제교사라는 말들도 있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는 광주의 김준태 시인이 <그의 '이야기詩'는 찢어버릴 수 없는 우리시대의 지도(地圖)이며 과거의 역사뿐만이 아니라 내일의 거울로써 우리를 비춰준다. 그리고 지난 시절 헛된 노래만을 불러왔던 우리들의 목울대를 하염없이 울려준다.
고향, 도라산역, 작은 학교의 이야기들……. 특히 1951년 '거창양민학살'을 형상화한 장시 '그 골짜기의 진달래'는 100년 한국시문학사 속에서 우리들 모두가 가슴 치고 읽어야 할 최고의 레퀴엠(진혼곡)이요 절창이며 그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에게 바치는 부활의 헌사가 아닌가.
아흐, 김태수 시인의 '살아남아 부르는 환장 노래'를 따라 읽다가, 남자무당(박수)처럼 신(神)들려 노래하다가 밤새도록 나는 잠을 못 이루었다>고 과찬한 장시 '그 골짜기의 진달래'를 얻었다.
시 '참꽃'은 장시(長詩) 속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그 와중에서 캐낸 가슴 아픈 한 편이다. 궁핍한 산골의 노인네가, 부모님이 무슨 이데올르기가 있었겠는가? 다만 그들에게는 국군이건, 경찰이건, 설령 빨치산이건 버릴 수 없는 살붙이, 아들딸들이었음 외에는.
이제 얼마 후면 음력으로 칠월 스무 이렛날이다. 이 날이면 아버지 기일(忌日)을 지키기 위하여 경북 고향으로 가는 버스 속에 내가 있을 것이며, 또한 그 시간에는 거창군 신원면소재지 신원중학교 옆의 합동묘소(지금은 기념관이 건립되었음)에서는 양민학살사건 희생자를 위한 위령제가 열리고 있을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향수를 불러오는 거창이란 도대체 내게 무엇인가? 그 시절 사시나무 떨 듯 처량하였을 소백산맥 자락의 모든 마을과 수많은 학살 현장, 그리고 나의 거창군 신원면(神院面)이 진실로 신원(伸寃)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