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이런 경험 있는지 모르겄네 / 내 어릴 적 제일로 싫었던 아버지 심부름 / 아침마다 퍼런 풀죽 뱃가죽이 들붙던 날 / 야야, 자전거 끌고 윗마을 방앗간에 다녀오너라 / 정말 녹슨 자전거를 끌고 저녁답 / 두 마장도 넘는 진창길을 따라 갔지만 // 어이구 어쩌나 아무 것도 없는데 / 방앗간 주인은 쌀 말통을 거꾸로 세워 보이고 / 돌아서는 길, 발이 붙어 떨어지지 않던 날 / 차라리 저뭇한 길이 한없이 고맙던 날. (필자의 졸시 '어릴 적 방앗간 그 저뭇한 길' 전문)>
중학생 때쯤이었던가, 학교 앞 문방구에서 외상 담배 사오라는 것과 집에서 두어 마장 떨어진 방앗간에 가서 외상 쌀을 가져오라는 아버지의 심부름은 정말 하기 싫었다. 쌀이 없다고 주인이 빈 쌀통을 열어 보일 때의 심정은 지금도 가슴을 아리게 할 정도로 참혹한 장면으로 각인되어 있다.
명색(名色)이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아버지였는데 왜 그리 가난했던지. 그로부터 얼마 뒤 필자는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고 일만 수천 원의 월급으로는 제대로 쌀을 사 두고 먹을 형편이 아니었음을 안 후부터 쌀의 위력, 즉 '집안에 쌀만 있으면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라는 말을 처절하리만큼 실감했으며 논을 많이 가진 사람은 당연히 부자라고 여기며 부러워하였다.
지금의 사정은 어떤가. 총체적인 농촌 황폐화가 지속되면서 젊은이들은 모두 떠나버렸고 쌀농사를 아무리 잘 지어봤자 자녀들의 학비 충당은커녕 가계(家計)유지도 어렵게 되었으며 금쪽 같은 쌀을 생산하던 골짜기 자갈논배미들은 독새풀이 가득한 휴경지(休耕地)로 바뀐 지 오래다.
어디 그뿐인가. 쓸만한 땅들은 거의 투기꾼들에게 점령되는 한 편 도회에서 멀리 떨어진 벽촌(僻村)의 전답은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아 팔래도 팔 수 없는 천덕꾸러기로 전락되었다.
지금부터의 논의주제에 대하여 필자는 전문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FTA)은 역내 회원국 간의 관세 및 기타 제한적 통상규제 완화 내지 철폐로 무역자유화를 추구하고, 이를 통하여 자원의 효율적 배분과 시장 확대에 따른 공동의 경제적 이익을 향유하고자 하는 국가 간 협정이며, 지난해 멕시코 칸쿤에서 전 한농연 회장 이경해 씨를 죽음으로 몰고 간 세계무역기구(WTO)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과, 칠레와는 세계 국가 간 첫 협정으로서 이미 1999년에 시작하여 오랜 협상 끝에 2002년에 타결, 이의 국회비준안 처리과정만을 남겨 두고 있다는 것뿐.
우리 제품이 외국에 수출돼 팔리려면 관세를 물어야 하나 그 나라와 FTA를 체결하면 관세를 낼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에 가격이 그만큼 낮아지고, 낮아진 만큼 외국시장에서 경쟁력이 생긴다.
그러나 농업을 포함한 전 산업이 자유화 대상이므로 너무 싼 칠레의 농산물이 한국에 들어오면 우리 농산물로는 경쟁을 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 때문에 국회비준 절대불가라는 생사기로의 명제를 내걸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국민의 참여 통로가 막힌 자칭 참여정부는 FTA의 타격으로 인하여 농촌이 더욱 피폐해질 것이라고 믿는 농민들에게 비준안 처리 이후의 피해에 대한 보상대책을 비롯하여 홍보나 설득을 얼마만큼 했느냐는 자성(自省)과, 자신의 지역구에서 이번 사안에 대하여 철저히 침묵했을 것임은 평소의 행티로 미루어 뻔한 농어촌 출신 국회의원 나리들은 찬반토론마저 거부한 채 국회단상을 점거하고 히죽거리며 기념촬영을 해대다 국회의장으로부터 그런 짓거리들은 다방에나 가서 하라고 핀잔을 듣고도 전혀 부끄러운 기색을 찾아볼 수 없으니.
〈저 잘난 시상, 어지러이 세설은 치고 / 그 시상 뼛골 녹도록 흙을 파고도 / 씨팔, 사십 넘도록 계집 하나도 못 얻고 / 씨팔, 땡전은커녕 빚더미만 안고 지고 / 그렇듯 먼 곳만을 바라보면 용헌가요 / 우는 듯 노여운 듯 숨만 죽이면 장헌가요 (농민시인 고재종의 시 '장승에 대하여' 한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