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을 떠도는 겨울 안개들아
창밖을 떠도는 겨울 안개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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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시인의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사랑,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사랑이란 단어만큼 위대한 말이 또 있을까요. 사랑 때문에 울고, 웃고, 싸우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외로워하고, 쓸쓸해하고, 그리워하고, 기다리고... 어찌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모두 이 사랑 때문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사랑이 없는 삶이란 게 과연 있기는 한 것일까요.

시인은 "사랑을 잃고" 난 뒤 그 아름답고도 달콤했던 사랑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 마지막 인사의 글을 씁니다. 아니, 그 사랑을 영원히 잊어버리기 위해 그렇게 글을 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짧았던 밤" 과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 과 "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 에게 인사를 합니다. "잘 있거라" 라고.

그러나 시인은 그 인사의 글을 순결한 백지 위에 함부로 옮겨 적지 못합니다. "잘 있거라" 란 그 단어를 그 하이얀 백지 위에 적으려니 그 인사가 오히려 낙서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렇게 인사를 하기가 공포스럽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 공포스럽고도 긴 망설임 끝에 눈물을 흘리며 "잘 있거라" 란 인사의 글을 쓰고 맙니다.

이제 시인은 마침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가 없고 아무에게도 부치지 못하는 그 공포의 편지를 쓰고 나자 이제 이 세상에서 소중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마음의 문을 굳게 잠급니다. 그와 동시에 나의 사랑은 내 텅 빈 마음 속 깊숙이 갇혀버리고 맙니다.

사랑, 대체 사랑은 무엇일까요? 사랑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환상 같은 그 무엇이 아닐까요.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그 한사람이 사랑의 모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엄연히 실체로 존재하고 있고, 언제나 아름다운 목소리로 속삭이고, 언제나 만져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연 진정한 사랑이란 실체로 존재하는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이른 새벽 텅 빈 들판을 하얗게 덮고 피어오르는 겨울 안개 같은 것일까요. 그 차디찬 겨울 안개를 따스하게 쓰다듬는 찬란한 햇살 같은 것일까요. 대체 사랑이란 무엇이며 어떤 것이기에 우리는 오늘도 매화 몽오리처럼 눈을 부비며 사랑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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