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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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부 시인의 "봄"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 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비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 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꽁꽁 얼어붙히는 강추위도 여러 번 겪다 보니 이제는 지겨워지기까지 합니다. 펑펑펑 쏟아지는 함박눈도, 이 세상을 온통 은빛으로 빛내며 쌓여있는 눈도 이제는 그만 따스한 햇살에 녹아내려 맑은 개울물로 졸졸졸 흘러내렸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바닥까지 꽁꽁 얼어붙은 냇물와 가슴 속까지 시린 강물도 이제는 몸을 풀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텅 빈 들판에서도 갑자기 아지랑이가 가물가물 피어오르면서 여기저기 파아란 새싹이 뾰족히 올라올 것만 같은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이러한 기대는 너무 때 이른 환상에 불과할까요.

{사진3}시인 이성부는 계절에 관계없이 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인은 봄에도 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봄에도 봄을 기다린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당연히 마음의 봄을, 텅 빈 벌판 같이 황량한 마음의 밭에 파아란 새싹을 틔워줄, 그리하여 메마른 마음의 밭을 촉촉하게 적셔줄 그런 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텅 빈 마음의 밭에 씨를 뿌리고 싹을 틔우는 그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 사람은 내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내게 다가오는 정말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그 아름다운 사람은 "뻘밭 구석이거나/썩은 물웅덩이"이 같은, 버림 받고 소외된 곳을 먼저 다독여놓고 다가오는 아주 착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애타게 기다리는 또 한 사람이 어서 오라고 어서오라고 손짓 발짓을 하고 마음에 조급증을 내어도 절대 서둘러 달려오지 않습니다. 또한 그 오랜 기다림 끝에 맞이하는 그 사람이기에 "너를 보면 눈부셔/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습니다. 또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나는 아무 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기다리는 봄은 바로 그 아름답고 착한 사람입니다. 애타게 그리워 긴 기다림에 목이 길어진 기린처럼 그렇게 보고 싶었던 고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봄은 우리들의 마음 속에 먼저 다가옵니다. 봄이 우리들의 마음의 밭을 먼저 갈지 않으면 아무리 얼어붙은 이 세상을 푸르게 물들여도 결코 진정한 봄은 오지 않은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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