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가그라 내 아들아
맘 약해진다 돌아보지 말고
어서 가그라 내 아들아
산들도 주저 앉아 신음을 허고
벌판도 농약 먹고 뻗어버렸다
메말라 비틀어진 고향의 마을
메말라 비틀어진 고향의 마을
돌아보지 말고 어서 가그라
어서 가그라 내 아들아
명절이라고 내려오지 말고
독허게 살아라 내 아들아
고리채 잡부금에 등이 휘었고
신경통 해소병에 속이 곯았다
통곡과 자살기도 술주정의 고향
통곡과 자살기도 술주정의 고향
돌아보지 말고 어서 가그라
어서 가그라 내 아들아
서울 놈헌티 질들이지 말고
이를 갈며 살어라 내아들아
니 가슴 깊은 곳에 발톱 돋거든
저 산의 힘센 뜻을 깨우치거든
집채만헌 호랑이로 돌아오니라
집채만헌 호랑이로 돌아오니라
아먼 아먼 돌아와야한다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창원에도 엊그제부터 참 많은 눈이 내렸습니다. 근데, 장독대 위에 하얗게 쌓인 눈만 바라보면 갑자기 배가 고파옵니다. 장독대 두껑마다 소복소복 쌓인 눈이 마치 하얀 쌀밥처럼 먹음직스럽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시꺼먼 보리밥 같은 세상을 어느새 하얀 쌀밥으로 배부르게 뒤덮어 놓은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제 어릴 때에는 가장 무서운 것이 가난이었습니다. 맛있는 반찬은커녕 새까만 꽁보리밥 한그릇조차도 배불리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시꺼먼 꽁보리밥을 큰 대접에 퍼서 우물물에 말아 먹었습니다. 물 반 보리밥 반이라는 말이 꼭 들어맞았지요. 또한 밥상 위에 놓여 있는 반찬이라고는 된장과 땡초 몇 개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보리밥을 말아 국을 마시듯이 후루룩 몇 번 들이키고 나서 매운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 와삭 베어먹었습니다. 그러면 이내 눈물이 찔끔 나도록 지독히도 매워, 또 물에 만 보리밥을 서둘러 후루룩 들이마시곤 했습니다. 그때 우리들의 한끼 식사는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또한 그렇게 바삐 밥을 먹고 걸으면 배에서 물소리가 출렁거렸습니다.
그랬으니 밥상을 물리기가 무섭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면서 또 다시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어른들은 밥상을 치우기가 무섭게 끼니 때가 다가온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는 왜 그렇게 가난했는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들판에 나가 등골이 휘어지도록 일을 하는데도 이상하게 세 끼 밥조차 제대로 해결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보리밥을 추억의 음식이니, 특미니 하면서 잘도 먹지요. 하지만 그때 우리가 먹었던 그 꽁보리밥은 지금 사람들이 식당에 가서 맛있게 비벼 먹는 그런 보리밥이 아니었습니다. 건강에 좋다는 갖가지 나물을 넣고 참기름과 고추장을 넣고 비벼먹는 맛있는 그런 보리밥이 아니란 그 말이지요.
그때 우리가 먹었던 보리밥은 알멩이가 몹시도 컸습니다. 왜냐구요. 보리쌀을 아끼기 위해 미리 보리쌀을 한 번 쪘으니까요. 그리고 한 번 찐 보리밥을 소쿠리에 담아 마루에 매달아 놓았다가 끼니 때마다 솥에 넣고 다시 쪘습니다. 그러니까 두 번 찐 것이었지요. 그러므로 보리밥 알갱이가 두 배로 커질 수밖예요.
노동자 시인이란 대명사가 붙은 김해화 시인은 고향인 전남 승주를 떠나올 때 어머니께서 하신 그 말씀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시인의 어머니는 말합니다. "어서 가그라 내 아들아/맘 약해진다 돌아보지 말고/어서 가그라 내 아들아//산들도 주저 앉아 신음을 허고/벌판도 농약 먹고 뻗어버"린 곳이 네 고향이라고.
"메말라 비틀어진 고향의 마을"에 무슨 정이 남았다고 돌아보느냐고. 명절이 되어도 고향에 내려오지 말고 "독허게 살아라"라고. 네가 태어난 고향은 "고리채 잡부금에 등이 휘었고/ 신경통 해소병에 속이 곯았"고, 날마다 통곡과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나는 "술주정의 고향"이라고.
그리고 시인의 어머니는 눈 깜짝하면 코마저 베어간다는 아들의 서울살이에 대해 신신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서울 놈헌티 질들이지 말고/이를 갈며 살어라"고. 그리고 "니 가슴 깊은 곳에 발톱 돋거든/ 저 산의 힘센 뜻을 깨우치거든// 집채만헌 호랑이로 돌아오니라"라고.
하지만 막상 서울로 올라온 시인은 가진 것도 배운 것도 별로 없습니다. 그 누구처럼 든든한 빽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그대로 주저앉아 굶어 죽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래서 가진 것과 배운 것, 그 알량한 빽도 필요없는 노동판에 나가서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노동일을 하면서 "가슴 깊은 곳에 발톱"을 세웁니다. 어머니의 말씀처럼 "저 산의 힘센 뜻을 깨우치"기 위해.
지금 세상은 하얀 쌀밥 같은 눈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제가 이 세상을 살다가 마음이 쓸쓸하고 고될 때마다 "저 산의 힘센 뜻을 깨우치"기 위해 자주 가던 불모산 자락에도, 성주시 곰절에도 쌀눈이 하얗게 뒤덮여 있습니다.
문득 저 쌀눈이 시인의 어머니처럼 손짓하며 "어서 가그라 내 아들아/ 서울 놈헌티 질들이지 말고/ 이를 갈며 살어라 내 아들아" 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은 웬일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