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지 않은 얼음장 울멍울멍 떠내려가는 고향
녹지 않은 얼음장 울멍울멍 떠내려가는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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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환 시인의 "고향 앞에서"

흙이 풀리는 내음새
강바람은
산짐승의 우는 소릴 불러
다 녹지 않은 얼음장 울멍울멍 떠내려간다.

진종일
나룻가에 서성거리다
행인의 손을 쥐면 따뜻하리라.

고향 가까운 주막에 들러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
양귀비 끓여다 놓고
주인집 늙은이는 공연히 눈물지운다.

간간이 잣나비 우는 산기슭에는
아직도 무덤 속에 조상이 잠자고
설레는 바람이 가랑잎을 휩쓸어 간다.

예제로 떠도는 장꾼들이여!
상고(商賈)하며 오가는 길에
혹여나 보셨나이까.

전나무 우거진 마을
집집마다 누룩을 디디는 소리,
누룩이 뜨는 내음새......



얼음과 눈이 녹아내린 질퍽질퍽한 논둑에서는 금세라도 파아란 새싹이 쑤욱쑥 올라올 것만 같습니다. 가물가물하게 바라다 보이는 산모롱이에서는 금세라도 아지랑이가 마악 허리를 뒤틀고 있는 마을을 휘어감을 것만 같습니다. 얼음이 녹아내린 시냇가에서는 금세라도 갯버들이 노오란 꽃망울을 "울멍울멍" 피워낼 것만 같습니다.

바싹 말랐던 나무마다 제법 연초록 빛 물기가 비치고, 겨우내 빗장을 꽁꽁 걸어두었던 나뭇가지의 마른 싹들이 서서히 움트고 있습니다. 어디선가 하늘 높이 떠오른 종달새의 노랫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 2월의 오후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봄은 우리들 마음 속에만 다가온 것이 아니라 우리들 바로 가까이에 다가와 있습니다.

"흙이 풀리는 내음새"가 몹시 향기롭기만 합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강바람은/산짐승의 우는 소릴 불러/다 녹지 않은 얼음장" 밑으로 "울멍울멍 떠내려" 갑니다. 그런 날, 어느 텅 빈 나루터에 앉아 있다가 문득 낯 선 행인이라도 만나 "손을 쥐면 따뜻하"기만 합니다. 왜냐구요? 이미 나와 행인의 마음 속에도 봄이 다가와 있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시인은 그 행인과 동무 삼아 "고향 가까운 주막에 들러" 막걸리 한사발을 나눠 마시며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합니다. 주인집 늙은이는 술 안주로 "양귀비 끓여다 놓"으면서 "공연히 눈물" 을 지웁니다. 그때 문득 주막집 밖에서 들려오는 잣나무 우는 소리,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아직도 무덤 속에 조상이 잠자고/설레는 바람이 가랑잎을 휩쓸어" 가는 고향의 소리가 함께 들려옵니다.

그때 장꾼들이 왁자지껄 소리를 내며 주막집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시인은 장꾼들에게 묻습니다. 장사를 하면서 "오가는 길에/혹여나 보셨나이까" 무엇을요? "전나무 우거진 마을"을요. 그 마을에서 "집집마다 누룩을 디디는 소리"를요. 그리고 그 "누룩이 뜨는 내음새"를 맡아보셨나이까? 그 소리와 그 내음이 곧 나의 고향이며 사람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그 봄이오.

이 시를 읽으면 자신도 모르게 고향, 곧 봄의 향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맙니다. 이 시를 소리내어 읽으면 자신도 모르게 그 추운 겨울밤, 배 고프고 서러웠던 우리들의 어둔 인생살이가 절로 봄빛처럼 환하게 밝아옵니다.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아 다니며 내 고향을 한번쯤 지나쳐 왔음직한 그 장꾼들의 모습에서 시인은 이내 전나무가 우거진 고향과 누룩이 뜨는 고향의 향긋한 봄내음을 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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