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겅퀴야 엉겅퀴야
철원평야 엉겅퀴야
난리통에 서방 잃고
홀로 사는 엉겅퀴야
갈퀴손에 호미 잡고
머리 위에 수건 쓰고
콩밭머리 주저앉아
부르느니 님의 이름
엉겅퀴야 엉겅퀴야
한탄강변 엉겅퀴야
나를 두고 어디 갔소
쑥국소리 목이 메네
싱그러운 초록이 지쳐가는 유월이 그립습니다. 목덜미를 휘어감는 바람에서도 달콤한 풀냄새가 코끝을 간질이는 유월. 하지만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의 유월은 깊은 슬픔과 한이 올올이 피어나는 달입니다.
푸르른 유월의 녹음 속에서도 장미 꽃잎처럼 붉은 피내음이 묻어나는 것만 같고, 달콤한 바람 속에서도 매케한 화약내음이 풍겨나는 것만 같습니다.
반백년이 지나도록 우리 민족은 왜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눈 채 살아가야만 할까요.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을까요. 무엇 때문에 그 수많은 젊은이들이 조국 강산 곳곳에 붉은 피를 뿜으며 죽어갔을까요. 반쯤 뜬 눈 차마 채 감지 못하고 동족과 동족끼리 적이 되어 그렇게 처절하게 싸워야만 했을까요.
그들은 지금 구천을 떠돌며 살아남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을까요. 그들은 어서 남북이 하나가 되어 외세를 물리치고 알콩달콩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을까요.
그들은 우리 민족이 저 엉겅퀴처럼 굳세고 끈질기게 일어나 지구촌 곳곳에 한민족의 기상을 드높일 것을 바라고 있지는 않을까요. 온몸에 가시를 매달고 있으면서도 연보랏빛 어여쁜 꽃을 피워올리는 저 엉겅퀴처럼 그렇게.
들판 곳곳에 억센 뿌리를 내리고 잡초들을 헤집으며 끈질기게 자라나는 엉겅퀴를 오랫동안 바라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 이미 오래 전에 버려진 척박한 땅에서도 보아란 듯이 가시가 달린 파아란 잎사귀를 내미는 엉겅퀴를 바라보면서 지저분한 풀이라며 그냥 외면하고 지나간 적은 없습니까.
엉겅퀴. 엉겅퀴를 오래 바라보면 비록 똥구멍 찢어지도록 가난하고 끝없이 핍박받지만 그래도 억세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 민초들의 서러운 삶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엉겅퀴도 때가 되면 연보랏빛 어여쁜 꽃을 예쁘게 피워냅니다. 작은 행복에도 크게 만족할 줄 아는 우리 민초들의 가난한 웃음처럼 그렇게 말입니다.
<엉겅퀴꽃>의 시인 민영 선생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지금은 비무장지대가 되어버린 구철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이 시 곳곳에서는 남북 분단으로 인한 슬픔이 절절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아니, 그 슬픔은 마침내 한이 되어 철원평야 곳곳에 가시를 매단 엉겅퀴 잎사귀로 자라고 있습니다.
"갈퀴손에 호미 잡고/ 머리 위에 수건 쓰고/ 콩밭머리 주저앉아" 저도 모르게 님의 이름을 애타게 부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그 사랑하는 님은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난리통에 잃은 그 서방님의 이름을 목이 메이게 부르면 쑥국새의 슬픈 울음소리만이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옵니다. 쑥국~ 쑥국~ 그래서 나도 목이 메이고 쑥국새도 목이 메입니다.
<엉겅퀴꽃>은 우리 민요에서 자주 발견되는 4·4조의 리듬을 지니고 있는 일종의 민요시입니다. 처음부터 네 글자로 시작하여 끝까지 고집스러울 정도로 네 글자를 정확히 지키고 있습니다. 또 "갈퀴손에 호미 잡고/ 머리 위에 수건 쓰고" 처럼 이 시 곳곳에는 우리 민초들의 가난한 생활상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시를 소리 내어 읽으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돕니다. 쑥국~ 쑥국~ 목 멘 쑥국새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찢어집니다.
하지만 그 서방님은 김소월의 <초혼>처럼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며 "허공 중에 헤여진 이름이"며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며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 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노래로도 즐겨 부르고 있는 <엉겅퀴꽃>은 우리 민족의 분단과 그 분단으로 인해 버림 받고 상처 받은 우리 민초들의 애달픈 가슴앓이를 사실 그대로 드러낸 시입니다.
특히 현대시에 우리 민요의 리듬과 정서를 밑그림으로 깔아놓아 우리 민족의 오랜 한의 정서를 자연스레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은 민영 시인의 시를 한번쯤 나즉하게 읊조려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