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은 우리가 숨을 쉬고 있는 동안의 모든 형태를 포함합니다. 그러기에 삶은 체험과 동의어이며 시각, 촉각, 미각, 후각, 등 감각 기관에 관계되는 모든 형태의 실제이며 직접 체험과 간접 체험들로 구성됩니다. 여기서 간접 체험은 최소한의 공감대가 형성된 즉, 직접 체험 이외의 모든 체험을 포함하나 풍문 풍설 등 정확성이 떨어지는 것들은 체험의 범주에 넣기 어렵습니다.
체험은 그 무엇보다도 시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며 어떤 시를 읽을 때 '이 글에는 삶이 도외시되었다'거나 '기교 뿐 삶이 없다'라는 말이 나왔다면 그 시는 생명이 없는 시, 시를 쓴 시인에게는 그보다 더 치명적 아픔을 주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체험이 도외시된 시는 바로 잠꼬대의 시이며 몽유병 환자의 몽환이라고 극언을 서슴지 않는 시인들도 있습니다.
시인이거나 시를 쓰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에게서 간혹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경험의 폭이 적다'류의 말인데 일부러 억지 경험을 그것도 어렵고 피곤한 엉뚱한 짓들을 골라서 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부류들은 그들이 1920년대에 살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며 선배 시인들의 기행을 멋으로 답습하고 있다는 자각을 빨리 해야 합니다. 문단 야사에는 선배 문인들의 기행, 그것도 기상천외한 행위들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예를 들면 횡보 염상섭 등등의 문인들이 저지른 '백주 승우 사건'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가장 충실한 사회인이 가장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즉 시인의 삶은 이오덕 선생의 말처럼 '병들지 않은 삶,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남을 따라가는 삶이 아닌 바람직하고 건강한 삶'을 말합니다.
시 밖의 사람들은 '글쟁이는 기인이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습니다. 이 말들은 오랜 기간 동안 내려온 부끄러운 전통에서 비롯된 옳은 말이며 아직까지도 어지간한 기행쯤은 문인들 스스로도 이해하자는 쪽이나 이제는 고쳐져야 할 때라고 봅니다. 시인의 생활은 적어도 다른 사람의 본보기가 되어야 하며 직장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게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기에 체험도 보편성이 획득된 체험, 곧 동시대를 살고 있는 이들이 공감하는 보편적 체험을 의미하는 것이지 별천지 사람들의 별난 체험들은 많은 위험 요소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체험의 개성적인 부분에만 매달려 공감이라는 독자의 필요를 외면한다면 이는 실패작을 낳을 도리밖에 없을 것이며 보편성이 빠져버린다면 그 시는 그냥 시라는 이름을 빌었을 뿐 의미를 찾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개인주의적이며 배타적으로 흐를 위험성을 가지게 되며 별천지 경험들을 공유한 일부 시인과 독자들이 자기네들끼리의 짝짜꿍에만 효험을 보게될 뿐입니다. 이런 시들은 애매모호하며 나아가서는 통속적인 저질의 시로 전락할 우려가 매우 높다고 하겠습니다.
체험과 맞서는 개념으로 꿈을 들 수 있습니다. 오톤 M 리치오 씨는 꿈을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는 과정이라고 정의한 바 있으며 꿈에 바탕을 둔 시들은 훌륭한 작품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습니다. 사실 꿈 그 자체는 삶의 이상이며 형이상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형이상 (형체를 갖지 않는 대상, 이성적 사유나 독특한 직관에 의해서만 포착되는 모던한 것들) 형이하(형체를 가지는 것. 감성적인 경험으로 형체를 파악할 수 있는 리얼한 것들)를 두고 볼 때 현실은 형이하에 속하겠지요.
시는 예언적 기능을 가진다고 누군가가 말했으며 어쩌면 이 꿈이 바로 그런 기능을 내포하고 있는 지는 모를 일입니다. 꿈의 시화가 가진 결함은 체험이 가진 결함보다 더 커서 꿈을 예언적 환상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낳을 수 있으며 꿈에서 얻은 세부 사항들을 시처럼 보이도록 늘어놓았을 때 그것이 몽유병자의 몽환이라는 오해에 가 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꿈을 잠 속에서 얻은 그런 꿈만으로 해석되어서는 곤란합니다. 개인의 시에 대한 관점도 엄밀한 의미에서 꿈이며 자기 아집에 사로잡히기에 가장 좋은 단서로 제공되기도 합니다.
결국 시란 '현실적 삶과 더 나은 미래를 지향하는 그런 꿈들이 적절한 조화를 이룰 때 남들이 공유하는 현실적 경험의 보편성과 꿈이라는 개성을 섞음으로서 자연 발생되는 언어 예술'이라고 한다면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느낌은 정감과 동의어로 쓰입니다. 시는 느낌과 생각을 정리하여 연과 행을 구별한 문학의 한 장르이기도 합니다. 느낌은 시의 분위기를 좌우하며 시인의 느낌이 시로 발표되었을 때 바로 독자들이 가슴에 가 닿아 감동을 이끌어 내는 역할을 합니다.
정감, 감정은 이성과 대립되는 개념이며 이성은 감성을 통제하는 역할을 합니다. 감정은 개인적 태도에 의해 표현되어지는 것이며, 시인들에 의해서 표상적인 상징으로 구체화된다고 합니다.
시에 있어서의 무절제한 감정의 표출은 시를 가볍게 하거나 유치함으로 전락케 하는 요인이기도 하며 대상에서 받은 느낌으로 마음 아파한다는 의미의 감상으로 빠져들기도 합니다. 시인의 정서가 다른 사람들과는 대별되는 것 중의 하나는 사소한 일에도 쉽사리 깊이 몰입되는 원인으로 작용되기도 합니다. 이성이나 의지보다 감정, 특히 슬픔의 감정을 서정의 본질로 낭만주의자들은 믿습니다.
시의 대상에 대하여 감정이나 정신을 투사하여 자기와 그 대상과의 융화를 꽤하는 감정이입은 시에 있어서 필수적 과정이며 이에 대한 훈련은 시의 성패를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쓴다는 것은 자신의 언어를 형상화 시켜 내보임을 의미하며 기초적인 시의 지식을 인식하는데서 출발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든 습작기에서 부딪치는 수많은 좌절을 경험해야 하며 한 줄의 시를 위하여 한없이 다가오는 머릿속의 깜깜함을 지워나가야 합니다.
교회의 교인들이 대표 기도를 요구받았을 때 처음에는 그런 대로 잘 이끌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음을 알 때의 당혹감 같은 느낌을 수없이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책상 곁에 한 편의 시를 위하여 구겨진 원고지를 보며 나는 혹시 시인으로서의 자질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하고 좌절해 버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교과서적 강박 관념에서 비롯된 것일 뿐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한 번 그려봐야겠다는 마음으로 출발한다면 시는 매우 쉬우며 누구나 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결국 시는 이웃에 대한 따뜻한 애정으로 출발되며 또한 시는 자신의 삶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시는 김명인 시인의 '동두천'이라는 시입니다. 그는 '황량하고 힘겨운 시대에 시를 쓰면서 삶과 사물에게 얼마만큼의 절실한 사랑을 베풀고 있는 지 생각할 수록 부끄럽다'고 시집 '동두천'의 자서에서 밝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