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리드가 뭐 길래…
더 이상 섬유는 옷의 재료가 아니다. 코오롱이 아라미드 섬유의 종류인 ‘헤라크론’을 자체 개발해 국내에도 슈퍼섬유(Super Fiber) 시대가 도래 했다.
아라미드는 총탄을 막아낼 정도로 내구력이 강하고 섭씨 500도의 고열을 견뎌내는 초강력 섬유를 지칭한다. 동일 중량의 철보다 강도가 5배 강하고, 가벼우며 뛰어난 내열성과 낮은 절단성으로 경량화가 요구되는 산업분야에 이용가치가 높다. 방탄복과 타이어, 브레이크 등의 소재로 쓰이며 군수·자동차·항공·우주 분야에 사용되고 있다.
대부분의 첨단산업과 마찬가지로 이 부문에서도 미국, 일본, 유럽이 선두주자다. 특히 미국의 듀폰은 1980년 아마리드 섬유의 종류인 ‘케블라’를 출시하면서 방탄조끼에 실용화 했다. ‘케블라’의 강하고 질긴 섬유를 여러 층으로 겹쳐, 고속으로 회전하면서 들어오는 총탄의 속도를 멈추게 하는 원리를 적용했다.
한편 이 아마리드 섬유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은 미국 듀폰(케블라), 일본 데이진(트와론), 한국 코오롱(헤라크론) 3곳밖에 없다.
현재 코오롱이 생산하는 아라미드 세계시장 규모는 1조7000억원 정도로, 계속 성장하고 있다. 듀폰(46%)과 일본 데이진(44%) 두 회사가 세계시장의 90%가량을 점유하고 있으며, 후발주자인 코오롱이 10%를 차지하고 있다.
듀폰의 생떼인가?
지난 20일 CNN은 기소장 내용을 인용하면 “8월 21일의 기소장 내용이 이제야 밝혀진 것은 그동안 양국 정부가 이 건을 어떻게 다룰 지 협의중이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CNN은 코오롱이 수년간에 걸쳐 듀폰사의 케블라 섬유 제조 관련 비밀을 절도(steal)해 경쟁품인 ‘헤라크론’ 섬유를 만드는 과정에 이용했다고 보고했다.
듀폰은 미국의 대표적인 화학회사로서 나일론 등을 개발하고 회사 연구소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기도 한 글로벌 기업이다.
2011년 기준 미국 아마리드 시장의 76%를 장악하고 있는 듀폰이 글로벌 특허 소송을 제기한건 코오롱이 처음이 아니다. 듀폰과 아라미드 개발 경쟁을 벌였던 네덜란드 기업 악조는 11년간의 전쟁 끝에 일본기업으로 넘어가는 비운을 겪은 바 있다.
듀폰은 애시 당초 코오롱이 자사에서 해고된 엔지니어를 고용한 것과 관련해 영업 비밀을 침해했다고 주장, 지난해 11월 미국 연방법원은 코오롱에게 9억1990만 달러(약 1조445억원)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당시 미국에서 진행된 손해배상 소송에서 배심원들은 “코오롱이 듀폰에서 케블라 마케팅을 담당했던 인사를 채용해 의도적이고, 악의적으로 기술을 빼돌렸다”며 코오롱의 불법행위를 인정했다. 하지만 코오롱이 미국에서 ‘헤라크론’을 5년간 판매한 매출 30억에 비하면 미국 법원의 배상액이 부당하게 많다는 점이 눈에 띈다. 코오롱 관계자는 “아예 미국 땅에 디딜 엄두도 못 내게 하겠다는 심산이냐”고 반문했다.
이어 지난 8월 듀폰은 민간 법원에 핵심기술과 관련 영업 비밀 침해의 이유로 재기소했다.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지방법원은 듀폰이 제기한 민사소송에서 ‘헤라크론’ 판매를 20년간 금지 한다”며 듀폰의 손을 들어준 바 있다. 그러나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져 코오롱은 항소심이 끝날 때까지 ‘헤라크론’을 생산할 수 있다. 항소심 법정 심리가 열리는 오는 12월 11일에 열린다.
코오롱…나는야 희생양
코오롱은 이번 판결 직후 항소하겠다는 뜻과 함께 판결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 급한 불은 꺼둔 상태다. 코오롱은 발표를 통해 “코오롱은 분명하고도 명확한 법률적·사실적 근거들을 토대로 항소심에 임할 것이며, 항소심에서 보다 공정하고 유리한 판결이 나올 것을 확신한다”고 자신했다.
코오롱 측은 미국 항소법원에 크게 ▲듀폰 측이 영업비밀이라고 주장하는 부분은 실제 상당 부분 일반에게 공개된 정보인 점 ▲1심 재판에서 코오롱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증거들이 배제된 점 ▲논리가 부족한 이론에 근거한 손해배상액 산정 등과 관련해 집중 변론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번 기소와 관련해서 듀폰의 아라미드 특허들은 이미 수십 년 전 공개됐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용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미국 검찰의 기소는 미국 시장에서 계속 독점을 유지하려는 듀폰을 도와주는 것이라는 것이 코오롱 측의 주장이다. 코오롱 관계자는 “국책사업의 결과로 개발한 첨단산업 기술이 (미국 법원의) 일방적인 잣대로 무력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검찰의 기소 조치에 대해 코오롱 측 변호인인 제프 랜들(Jeff Randall)은 “듀폰이 영업비밀 소송에 의지해 아라미드 시장에서의 공정한 경쟁을 막으려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그는 “흔히 영업비밀 분쟁에서 정부가 개입해 형사 사건화하면 차후에 민사소송을 할 필요성가 없어진다”며 “2007년 6월 이후 이 사건을 조사해왔던 미 정부가 이제 와서 코오롱을 기소한 이유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고 강도 높게 반박했다. 코오롱도 ‘헤라크론’ 같은 새로운 제품으로 전 세계 시장에서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점을 지목한 것.
코오롱은 이번 기소가 30년 넘게 독자적인 기술 개발에 힘써 온 자사의 명예를 심하게 손상했으며, 세계 시장에서 공정하게 경쟁할 권리조차 빼앗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지난달 정치자금 문제와 관련 검찰에 고발됐던 이웅렬 코오롱 그룹 회장이 듀폰과의 소송에 대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 회장은 22일 古 구평회 E1 명예회장 빈소가 차려진 서울아산병원에서 기자들과 만나 듀폰 소송에 대해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이 짧은 한마디는 주변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강경히 대응 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보호무역주의 팽배
한편 2012년에는 선진국·개도국 모두 경기침체 장기화 영향으로 수입 규제의 장벽이 높아질 가능성이 높다. 미국 월풀의 삼성·LG 냉장고 및 세탁기 제소 사례에서 알 수 있듯 글로벌 기업조차 예전만 못한 판매 부진으로 경영에 어려움을 겪자 특허권 소송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한국지식재산보호협회 발표에 의하면 국내외 기업 간 국제특허 분쟁 소송건수도 2009년 154건에서 2011년 278건으로 크게 증가했다.
업계는 이번 사건을 전세계적인 보호무역 강화 조치의 한 예로 보는 시각이 팽배하다. 한국무역협회(회장 사공일)는 “유형별로는 반덤핑 및 상계관세, 세이프가드 조치 중 반덤핑 관세부과가 선호된다”고 밝혔다. 2011년 기준으로 보호무역 수입규제 유형 111건 중 반덤핑(77.5%)이 압도적이다. 반덤핑 조치는 어떤 국가의 제품이 정상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수출되어 수입국가의 국내 산업에 피해를 주는 무역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로, ‘반덤핑 조사 착수’ 그 자체만으로도 수출억제 효과를 얻을 수 있어 주로 활용된다.
지난 2008년부터 올해 8월까지 우리기업들의 국제특허소송은 총 919건이다. 이 가운데 승소 41건, 패소 64건, 소 취하 122건으로 나타났으며 692건은 현재 소송 진행 중이다. 새누리당 홍일표 의원이 한국지식재산보호협회로 부터 제출받은 ‘국제 특허소송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종결된 소송 25건 중 우리기업은 19건을 패소해 승소율이 24%에 불과했다고 한다. 홍 의원은 “우리기업들의 지식재산권 분쟁에 따른 국제특허소송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면서 “정부는 주요 수출국에 대한 해외 지식재산권 보호 정보 및 분쟁 대응 전략 제공에 힘쓰고 중소기업과 벤처기업 등 지식재산권 보호 여력이 없는 기업에 소송보험 가입비용 지원을 확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수출에 많은 비중을 둔 한국 기업들이 해외 진출을 추진함에 있어 지식재산 관련 소송이 악용되는 사례가 늘고 있어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삼성-애플 소송처럼 특허, 디자인 도용 외에도 듀폰-코오롱의 경우처럼 영업비밀 등을 빌미로 엄청난 배상액이 걸릴 수 있기 때문에 해당 국가의 문화와 소송절차까지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의 경우는 영업 비밀에 대한 법률적용은 특허법처럼 연방법이 아니라 주마다 다른 주법이다. 따라서 어느 주에서 소송을 하였느냐에 따라 판결이 다소 달라 질 수 있다는 점은 미국에게는 득 우리에게는 독이다.
한편 이번 코롱-듀폰 소송을 두고 코롱이 정말 듀폰의 전직직원을 통해 기밀사항들을 획득 하였느냐는 점을 떠나 코롱이 듀폰과의 치열한 경쟁상황에서 범한 너무 경솔한 행동이라는 지적도 있다. 국제변호사 박씨는 “다시 한번 국내 기업들에게 지적재산에 대한 전략적 마인드를 가져야 함을 주지 시키는 사례”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