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태종은 첫째 아들 양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 하는 적장자 세습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세종대왕)에게 왕위를 넘기는 용단을 강행했고, 세종대왕은 나라의 힘을 키워 태평성대를 누리게 된다. 삼성의 故 이병철 선대 회장 역시 첫째 아들 이맹희씨가 아닌 셋째 아들 이건희 회장에게 삼성왕국을 물려주며 세종이 되기를 바랬을까? 이건희 회장 취임 그 후 25년이 지난 지금, 삼성은 안팎으로 승승장구하며 국적을 뛰어넘는 또 하나의 왕국을 건설했다.
이건희 회장은 부친인 故 이병철 창업주가 별세한 지 12일 만인 1987년 12월1일 그룹을 물려받았다. 최고 리더십의 공백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재벌의 운영구조상 이병철 창업주의 사망소식이 전해진 25분 만에 삼성은 긴급사장단 회의를 열어 이건희를 그룹회장으로 추대했다. 故 이병철 선대 회장은 71년 셋째 아들 이건희를 2대회장으로 지명할 것을 밝힌 유언장까지 작성해 놓았을 만큼 그를 총애했다고 한다.
이건희 회장은 변화와 혁신을 기치로 그룹을 발전시켜 10조 원에 못 미치던 매출을 올해 383조 원까지 끌어 올려 25년 동안 39배 신장시켰다. 삼성의 시가 총액은 1987년 1조 원에서 올해 10월 말 기준으로 303조2천억 원으로 증가했다. 303배 증가한 금액이다.
1993년 삼성은 변화와 혁신을 강조하며 그룹의 체질 개선에 나선다. 당시 ‘신경영’을 선언하며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발언한 이 회장의 “국제화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가 된다.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자”라는 말은 이러한 의지를 잘 드러낸다.
故 이병희 창업주의 별세와 맛 물려 그룹 전체의 수익이 하락하는 상황에서 이건희 회장은 ‘품질 우선주의’를 표방하며 ‘대중화’에서 벗어나 전체적인 삼성 브랜드의 ‘명품화’를 선도한다.
‘반도체’로 안타
삼성전자는 1969년 11월 1일 설립됐다. 삼성의 창업주 故 이병철 회장의 ‘호암자전’에는 “삼성전자를 설립하려고 하자 기존메이커는 물론 심지어 국회의원까지 동원하여 저지운동을 맹렬히 펼쳤다”는 구절이 있을 정도로 기존 전자업계의 반발이 거셌다.
삼성은 삼성전자를 설립하면서 ‘수출 85% 내수 15%’를 목표로 내걸었으나 공업사협회회원들은 말도 안 돼는 목표라고 비판했고 여론과 언론도 삼성전자 설립을 반대했다. 박정희 정부는 이런 반대를 무릅쓰고 삼성전자 설립 인가를 내줬고, 삼성전자의 작년 매출의 84%가 해외에서 발생했으니 그 목표는 이젠 1%남은 셈이다.
이건희 회장의 경영방침인 변화와 혁신이 빛을 발한 최초의 분야는 바로 반도체다. 1974년, 한국 반도체가 파산에 직면하자 이건희 회장은 사재를 털어 인수했다. 이어 그는 故 이병철 선대 회장의 지원을 이끌어내 1982년 반도체연구소를 설립했다. 당시 “TV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데 반도체가 가능하겠느냐”, “되지도 않을 반도체 사업으로 다 말아먹으려고 한다”는 경영진의 반대에도 첨단기술 산업 진출이 삼성이 갈 길이라는 확신 때문에 선행 투자를 단행했다.
이건희 회장은 이 모든 우려를 결과로 잠재웠다. 1992년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로 64메가 D램을 개발하면서 반도체 시장의 신흥 강자가 된 것. 이후 20년 동안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한 번도 글로벌 1위를 내주지 않고 있으며 삼성그룹이 세계 전자업계에 우뚝 서는데 든든한 중심축 역할을 하고 있다. 이 회장은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은 외롭다. 더구나 무수한 사람들의 비난을 들으면서도 자신의 신념대로 밀고 나간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다”고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올해 1월에는 반도체 생산의 한계라고 여겨지던 40나노 급 메모리 생산을 넘어 30나노 급 메모리 개발에 성공해 경쟁력을 강화했다. 30나노 급 메모리는 삼성반도체의 제조원가를 크게 낮출 원동력으로 평가된다.
메모리 반도체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왜 삼성은 미국의 인텔(Intel) 같이 중앙처리장치(CPU)를 만들지 못하냐”는 비난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중앙처리를 강조하던 과거의 시스템과는 달리 개인 소장용 전자제품들의 시장 저변이 확대되면서 메모리 반도체는 컴퓨터를 넘어 디지털카메라, MP3, 이동식 저장장치, 일상 전자제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자기기에 사용되고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메모리 반도체는 성장성이 무궁무진한 산업으로 이건희 회장의 뚝심이 없었다면, 그의 말대로 영원한 후발 주자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애니콜’로 홈런
삼성은 1994년 ‘애니콜’이라는 효자상품을 배출한다. 1990년대 LCD 부분에서 일본 업체보다 후발 주자임에도 경쟁 업체를 앞질러 과감하게 12.1인치 LCD를 내놓아 업계 판도를 바꾼 것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당시 11.3인치를 표준 크기로 삼으려던 일본 업체들을 따라가지 않고 12.1인치를 선보였던 것은 모방으로는 선두에 설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시장의 반응은 빨랐다. 1995년 8월 국내 4위였던 삼성전자는 애니콜을 앞세워 세계 휴대전화 시장 1위인 모토로라를 제치고 51.5%의 점유율로 국내 정상에 올라선다. D램 시장의 호황까지 겹치며 당시로선 놀랄만한 2조 5000억 원의 순이익을 달성했다.
1990년대 중반 일기 시작한 애니콜 돌풍을 두고 업계 전문가들은 “당시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자랑하던 모토로라가 유일하게 점령하지 못한 고지가 한국” 이라고 평했다. 애니콜의 인기는 현재 스마트폰인 갤럭시S와 갤럭시노트 등 모바일 기기로 이어지며 연장선을 그리고 있다. 이 제품들이 벌어들이는 순이익은 그룹 전체의 40%에 육박한다.
애니콜이 뜨거운 감자로 확실하게 자리 잡는데 까지는 제품 품질, 적절한 스타마케팅, 브랜드 이미지, 고객맞춤 AS등 삼성의 전략적인 경영의 힘이 컸다. 하지만 무엇보다 국내 제품을 애용하고자 했던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한편, 삼성그룹이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휴대전화 사업에 편중된 이익구조에서 벗어나 수익원을 다양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휴대전화사업은 시장의 변화가 빠른데다 돌발적인 변수가 잦아 타격을 입을 경우 그룹 전체가 도미노처럼 무너질 수도 있다는 우려다.
지난해 이건희 회장이 “삼성을 대표하는 제품들이 10년 내에는 사라질 것”이라는 말로 위기감을 강조했듯 미래를 위한 새로운 성장 동력 발굴을 하는 것은 삼성의 필연적인 숙제다.
미국 애플은 소송을 통해 자사의 특허를 ‘훔쳐(steal)’간 삼성에게 ‘카피캣(모방꾼)’이란 오명(?)을 씌웠고 삼성은 장외 안팎으로 열심히 맞대응 중이다.
LG와의 기술유출 및 특허 분쟁 등 크고 작은 문제들도 삼성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지만 노련한 삼성은 애플과의 소송에 가장 중점을 두고 있다. 실제로 소송으로 인해 양측이 입을 재정적인 피해는 미미할 전망이다. 피해 보상액이 적은 데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재판의 특성상 양사가 판매 금지 및 폐기 처분 판결을 받을 때쯤이면 이미 그 제품은 구형 모델이라 시장에서 거의 팔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은 특허 소송으로 ‘카피캣(모방꾼)’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미지를 떠 앉았다고 발끈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삼성은 잃은 것이 없다”고 평한다. 그토록 원하던 애플 대 삼성 구도가 형성하면서 애플의 대항마의 이미지를 굳혀가고 있기 때문이다.
‘애니콜 원맨쇼’ 덕에 세계 휴대전화 시장의 신흥 강자로 떠오르자 한때 휴대전화로 세계를 호령하던 노키아가 몰락의 길을 걸으며 삼성전자가 승승장구 했으나, 200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맥월드에서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 출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삼성전자는 ‘스티브 잡스’라는 천재와 맹신적인 ‘애플빠’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애플신화’의 벽에 부딪힌 것.
삼성은 아이폰의 국내 상륙을 앞둔 2009년 8월 기존 스마트폰 모델을 업그레이드한 '옴니아2'를 출시했으나 아이폰과 경쟁하기에는 모든 격차가 너무 컸다.
다음해 그룹 역량을 결집한 본격적인 스마트폰 ‘갤럭시S’를 내놓고서야 비로소 추격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평가 받는다. 이후 삼성은 갤럭시탭, 갤럭시S2, 갤럭시S3를 잇달아 출시하면서 빠르게 애플을 따라잡고 있다.
2011년 6월 24일, 상황을 주시하던 애플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삼성의 갤럭시 시리즈가 아이폰과 아이패드의 디자인과 기술을 모방해 25억달러 이상의 손해를 봤다며 미국 법원에 특허침해금지 및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한 것. 삼성 또한 애플에 의해 자사의 무선통신 특허를 침해당했다는 반대소송을 제기하면서 이 소송은 글로벌로 확산되어 갔다.
현재 양사는 세계 9개국에서 50여건의 특허소송을 벌이고 있다.
삼성의 진흙탕 싸움
삼성그룹은 명실상부한 글로벌 선두기업으로 우뚝 섰지만 시련도 많았다. 안팎으로 싸움꾼의 면모가 서서히 발휘되며 비리, 소송, 노동착취 등의 잡음이 끊이질 않았던 것.
삼성의 잦은 ‘싸움’은 도전과 시련에 정면으로 맞서며 스스로를 다잡아가는 과정이며 이로 인해 지금 같은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게 됐다는 평가도 있지만, 故 이병철 선대 회장의 상속에 대한 CJ와의 상속분쟁으로 체면을 구긴데 이어 아직도 해결이 안 된 태안주민들의 지지부진한 보상문제(시사신문 602호 보도),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노동자의 백혈병 의문사(시사신문 603호 보도) 등은 마땅히 비난 받아야 할 부분이다.
특히 삼성가 이건희 VS CJ가 이맹희 구도의 ‘형제의 난’은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뉴스의 발원지가 됐었다. 삼성과 CJ의 대립은 故 이병철 선대 회장 장자인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이, 동생인 이건희 회장이 차명으로 보유해 온 선대회장의 주식 중 상속분을 달라며 지난 4월 소송을 제기하며 시작됐다.
감히 나보고 건희 건희 할 상대 안된다며 형 이맹희 씨에게 “우리집에서 퇴출당한 양반”이라고까지 서슴없이 독설을 퍼부은 삼성가 삼남 이건희 회장과 장남 이맹희씨의 소송싸움이 자기 아버지 추도식에까지 번져 급기야 가족에게까지 참배 시간대와 건물사용을 통제하는 등 가관을 보여주더니 이제는 설탕가지고 싸우는 천태만상도 보여주었다(시사신문 604호 보도).
2007년 12월 삼성중공업 태안반도 기름유출 사건의 보상을 아직까지 끌며 절망에 빠진 피해주민들을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양심적으로도 맞지 않는 행위로 삼성은 스스로의 얼굴에 시커먼 기름칠을 하고 있는 격이다.
태안 주민은 이건희 회장의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하며 “보상은커녕 시간이 끌며 본인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형성해 가는 삼성의 태도는 힘없는 위안부들의 절규를 무시하던 일본 정부와 다를 게 없다”고 분노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삼성이 후쿠오카 대지진 시 일본 정부에게 자발적으로 기부한 금액은 50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잘 나갈 때가 위기다
이건희 회장은 2008년 초 ‘삼성 비자금 특검법’에 50억원대의 비자금 조성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다. 하지만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서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인 이건희 회장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재계와 체육계 등의 건의에 힘입어 유죄 확정 4개월 만에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단독 사면을 받았다.
그 후 이 회장은 ‘은둔의 경영인’이라는 별명답게 국감에도 불출석하며 두문불출 하고 있지만 삼성인들은 이건희 회장을 ‘천황’이라고 부를 만큼 그 카리스마는 여전하다.
과거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법정에선 재벌 총수들이 한결같이 “제가”라는 표현을 쓴 반면 이건희 회장만 “본인”이라는 표현을 썼던 일화는 그의 높은 자존심을 드러낸다. 삼성이 잘못되면 한국이 잘못된다는 것은 매우 자명하다. 삼성그룹이 이건희 회장의 취임 25년을 돌아보며 비판과 성찰의 목소리로 바른 그룹 새우기에 앞장선다면 국민들은 “본인”이라는 표현에 토를 달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