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해운 김영민 사장이 갑작스럽게 사퇴의사를 밝혔다. 경영실적 부진과 영구채 발행지체 등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이유다. 그러나 업계는 이와는 다른 해석에 힘을 싣는 눈치다. 크게는 ‘시중은행들로부터 유동성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한 최은영 회장의 결단’이라는 것과 ‘최근 1500억원을 지원해준 대한항공의 압력’이라는 것, 두 가지다. 서로 다른 해석들이기는 하나 우려하는 상황은 공교롭게도 맞닿아있다. 한진해운이 추가 유동성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최은영 회장의 경영권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이다. 김영민 사장의 사의표명 전후로 드러난 한진해운의 상황을 조명해봤다.

일각에선 “계열분리 미운털…대한항공의 압력”
한진해운, 1년 내 대한항공에 1500억원 갚을까
지배구조 재편 가능성…최 회장 경영권 향배는
한진해운은 지난 11일 “김영민 사장이 경영 실적부진과 영구채 발행지체 등으로 재무구조가 개선되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했다”고 밝혔다. 다소 갑작스러웠던 그의 사의표명에 업계는 분분한 해석을 내놓았다.
먼저 그룹 안팎에서 제기돼왔던 김 사장의 ‘경영실패 책임론’이 재차 거론됐다. 증권업계 출신인 김 사장은 그 동안 해운업 불황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대규모 선박발주 등 공격적인 투자로 현재의 유동성 위기를 초래했다는 지적과 단기 유동성 강화에만 힘을 쏟느라 중장기적 영업전략 구축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에 채권단을 중심으로 한진해운 경영실패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됐고 김 사장이 전격 사퇴의사를 밝혔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진해운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업황침체가 맞물리면서 유동성 위기를 겪어왔다. 영업을 하는데도 손실을 보는 구조가 계속됐다. 적자가 누적되면서 한진해운 부채비율은 올해 6월말 기준 835%를 기록했다.
한진해운이 연내 갚아야할 기업어음(CP)도 2200억원에 달했다. 내년 3월 1800억원, 4월과 9월 각각 600억원, 1500억원 등 내년에도 갚아야할 돈이 산적해있다. 한진해운에서는 이를 4000억원 규모 영구채(만기가 30년 이상이고 주식특성을 가진 신종자본증권) 발행을 통해 해결코자 했다.
그러나 은행권에서 지급보증에 응해주지 않으면서 영구채 발행에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한진그룹(한진해운 최은영 회장은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의 동생 고 조수호 회장의 부인)에 손을 벌려 1500억원을 확보했다.
지원방식은 대한항공이 한진해운홀딩스가 보유한 한진해운 주식 38.08%(4570만7519주) 중 15.36%(1920만6146주)를 담보로 1500억원을 빌려주는 것이었다. 기간은 1년이다. 그러나 이 또한 대한항공의 부채비율이 올해 6월말 기준 887%라는 점, 주식을 담보로 자금지원을 했다는 점에서 지배구조 재편 가능성 등 각종 잡음을 양산했다.
경영책임 외 다른 시각은
김 사장의 사의표명 이후 그 배경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나온 것도 한진해운의 이 같은 상황과 무관치 않다. 업계에서는 김 사장의 사의표명 배경(공식입장 이외)과 관련 크게 두 가지 해석을 내놓고 있다. ‘유동성 확보를 위한 최은영 회장의 전략’이라는 주장이 첫째요, ‘자금지원을 해준 대한항공의 압력’이라는 주장이 둘째다.
한진해운은 갚아야할 돈은 산더미지만 수익창출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진해운이 유동성을 확보하려면 은행권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해운업황 침체가 장기화된데다 그 동안 한진해운과 국내은행들의 관계가 소원했었다는 점에서 은행권의 지원 움직임이 적극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은행권 관계자는 한 언론에 “한진해운이 경기가 호황일 때는 외국계 은행들과 거래를 해오다 불황인 지금에야 국내 은행권에 도움을 청하고 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한진해운이 씨티은행 출신인 김 사장을 필두로 그간 외국계 은행과 선박금융 등 주로 거래를 해왔다는 지적이다.
이에 최은영 회장이 국내 은행들로부터 유동성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김 사장 사퇴카드를 꺼내들었다는 설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김 사장 사퇴에 따라 국내은행들이 지원여부를 결정할 리는 없으나 원만하지 못했던 관계를 청산하자는 신호로 비춰진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국내은행들도 한진해운에 대한 3000억원 규모 브릿지론(Bridge Loan) 제공은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브릿지론은 일시적으로 자금상황이 어려워진 기업 등에 제공하는 대출로 일종의 ‘임시방편 자금대출’이다.
두 번째 ‘대한항공 사퇴압력설’은 다음과 같다. 대한항공은 현재 자금지원 후 한진해운에 대한 강도 높은 실사를 벌이고 있다. 대한항공은 재무담당 직원 등으로 팀을 꾸려 서울 여의도 한진해운 본사에 상주하면서 한진해운의 재무상황 뿐만 아니라 선박주문 및 대여상황, 사업계획의 적정성 등 경영진의 경영능력 검증형태로 실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사진의 강력한 요구라는 게 대한항공의 주장이나 자금지원을 이유로 계열사에 대해 실사를 하는 것은 이례적이라는 점에서 의구심이 나왔다. 더군다나 실사에 돌입한 지 일주일 만에 김 사장이 사의표명을 했다. 김 사장이 한진해운과 한진그룹 계열분리 작업을 주도해온 인물이라는 점에서 사퇴압력설에 힘이 실렸다. 압박용 아니냐는 것이다. 양사는 이 같은 의혹에 대해 강력 부인하고 있다.
최은영 회장 경영권은
김 사장의 사의배경과 관련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나 많은 이들은 우려하는 상황은 결국 동일하다. 유동성 위기로 인한 그룹의 앞날이다. 한진해운은 대한항공의 지원으로 급한 불은 껐지만 대외적으로 ‘1500억원도 조달할 수 없다’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CP와 회사채도 줄줄이 만기를 앞둬 추가 유동성 확보가 절실한 상황이다.
이에 따라 한진해운은 영구채 발행을 계속 추진하고 회사채 신속인수제 신청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문제는 영구채 발행에 실패할 경우다. 한진해운은 영구채 발행 실패에 대비해 유상증자, 자산매각 등 다각도로 자금확보를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근본원인인 업황불황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이 같은 방법은 임시방편에 불과할 뿐더러 흥행여부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게 업계 지적이다.
이 때문에 최은영 회장의 경영권 향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영구채 발행 등 추가 유동성 확보에 실패할 경우 최악의 상황, 그룹이 휘청거리는 상황을 우려하는 것이다. 이 경우 수장인 최은영 회장의 경영권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비록 대한항공이 추가지원 가능성을 열어뒀지만 계열분리를 고려한다면 더 이상의 지원요청은 무리일 것으로 보인다.
현재도 대한항공의 지원방식과 관련 ‘최은영 회장의 영향력 감소’ 및 ‘조양호 회장의 영향력 증대’를 점치는 시각이 많다. 1년 안에 1500억원을 갚으면 이 같은 주장은 불식되겠지만 역시나 업황불황이 문제다. 돈을 갚지 못하면 담보로 제공된 한진해운 지분 15.36%가 대한항공에 넘어갈 수 있다. 이 경우 양측 지분격차는 21.53%(한진해운) 대 15.36%(대한항공)로 좁혀지게 된다.
대한항공이 내년 예정된 한진해운 유상증자에 적극 참여하는 등 지분확대까지 나선다면 계열분리가 힘들어지는 것은 물론, 최은영 회장의 경영권이 위협받을 가능성도 있다. 이와 관련 대한항공은 자금지원이 경영간섭과 무관하다는 입장을 공고히 했다.
하지만 계열분리 문제를 두고 최은영 회장과 조양호 회장이 이견을 보여 왔다는 점에서 최은영 회장의 경영권 향배에 대한 관심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한편, 한진해운에 대한 고강도 인력 구조조정도 점쳐지고 있다. 대한항공의 실사결과에 따라 한진해운 인력감축이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국내은행들도 브릿지론 제공조건으로 한진해운에 인력감축 등 고강도 자구책 마련을 주문할 것으로 알려졌다. 한진해운 측은 “구조조정과 관련된 말은 앞서간 추측”이라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