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3조원대 영업손실을 기록, 창사 이래 최악의 시련을 겪은 현대중공업이 잇따라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는 가운데 이번엔 여직원 대상 희망퇴직을 놓고 노사와 한 판 대결을 벌이고 있다.
지난 4일 현대중공업은 15년 이상 장기근속 여직원을 대상으로 일주일 간 희망퇴직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현대중공업은 “여직원들이 희망퇴직에 대한 문의를 해와 본인 의사를 존중하는 선에서 희망자에 대해 퇴직을 받는다”며 희망퇴직 시행 배경을 설명했다.
현대중공업은 희망퇴직을 신청하는 여직원에게 최대 40개월분의 급여와 자기계발비 1500만원을 일시금으로 지급하고 장기근속 대상 포상과 명예 승진 등을 제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총 대상자는 579명으로 추산됐으며, 실제 신청자의 규모는 회사 측이 공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가뜩이나 과장급 이상 사무직 대상으로 진행된 희망퇴직으로 사이가 벌어진 현대중공업 노사는 여직원 희망퇴직 문제를 놓고 한 판 맞붙게 됐다. 노조는 현대중공업의 여직원 희망퇴직 방침이 나오고 난 후 즉각 반발, 희망퇴직을 가장한 정리해고나 다름없다며 투쟁에 나섰다.
지난 9일 현대중공업 노조는 울산 동구 현대중공업 본사 내 노조 사무실 앞에서 구조조정 반대투쟁 선포식을 열고 “회사의 미래를 파탄으로 몰아가는 권오갑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의 퇴진 등 다양한 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선언했다.
◆여직원 희망퇴직, ‘강제 퇴출’ 논란 재점화
갈등 끝에 여직원들 대상의 희망퇴직은 지난 13일 접수를 마감한 데 이어 지난 19일 사내정보지 인사저널을 통해 종료가 선언됐다. 이들 대상자들은 오는 4월말까지 근무하고 퇴사할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창사 이래 처음으로 사무직 노조까지 창설되게 했던 사무직 과장급 이상을 대상으로 한 희망퇴직도 마무리됐다. 하지만 노사간의 사그라들기는커녕 더욱 불붙을 태세를 보이고 있다.
현재 노조는 희망퇴직 대상 중 희망퇴직을 신청하지 않은 나머지를 대상으로 회사 측이 교육을 실시하는 것에 대해 특히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노조는 지난 20일 오후 열린 대의원 간담회에서 사측이 여사원들에 대한 CAD교육을 계속 밀어붙일 경우 권오갑 사장 퇴진운동과 관련해 안팎으로 서명운동까지 벌이겠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CAD는 통상적으로 캐드로 불리우며 컴퓨터 지원 설계(Computer Aided Design)의 약어이다. 컴퓨터에 기억돼 있는 설계정보를 그래픽 디스플레이 장치로 추출해 화면을 보면서 설계하는 것을 말한다. 공학자, 건축가, 설계 활동에서 전문적인 설계를 지원하는 컴퓨터 기반 도구의 다양한 영역에서 사양된다.
노조 관계자에 따르면 현대중공업에서 CAD교육 대상자로 선정될 경우 2개월 정도의 교육을 거쳐 설계를 하게 되는데, 설계는 2~3년을 해도 제대로 해내기 쉽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회사 측은 교육을 받지 않을 경우 결근 처리하는 등 강압적인 자세로 나서고 있어 사실상 연차가 높은 여사원들을 잘라내겠다는 뜻이라는 것이 노조 측의 설명이다.
사측은 인사저널에서 CAD교육에 대해 “회사는 모든 구성원이 보다 질 높은 고부가가치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전문직무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가운데 여사원들도 전문직종인 CAD교육을 통해 직무역량을 강화함으로써 자신의 일에 대한 보람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지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25일에는 현대중공업 노조 측에 보낸 답변서에서 “인사규정 상 허용되지 않는 사유로 직무역량 향상 교육에 불참하는 인원은 무단 결근으로 처리한다”고 밝혔다. 노조 측은 “일부 구조조정 대상자를 교육대상자로 선정해 간접적으로 퇴직 압박을 넣는 것은 이미 업계에서 관례화된 일”이라고 반발했다.
앞서 현대중공업 노조 측은 회사 측이 면담 과정에서 사직서를 함께 돌렸다는 주장도 제기했다. 노조 측은 지난 18일 회사 측이 희망퇴직을 가장해 집단퇴출 프로그램을 시행할 경우 이를 강력히 저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노조 측은 “지난 13일 회사 측이 희망퇴직 면담을 하는 과정에서 사직서를 함께 돌렸다”며 “이는 희망자에 한해서 안내만 하겠다고 한 회사 측의 공언과 전혀 다른 것”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면담을 거쳐 희망자만 퇴직 처리를 받는 것이 아니라 사직원을 함께 배부하고 사직을 강요했다는 얘기다.
현대중공업 노조는 이와 함께 면담 과정에서 여직원들에게 교부된 문서 중에 포함된 사직원 문서를 함께 공개하며, 부당하게 퇴직을 종용한 회사 관계자들에 대해 징계할 것을 요구했다.

◆PIP교육 뭐기에…사무직 찍퇴 갈등도 재점화
앞서 희망퇴직에 응하지 않은 사무직 과장급 이상을 대상으로 진행되고 있는 교육도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회사 측은 사무직 과장급 이상이 희망퇴직으로 3분의 2정도 이상 회사를 떠났음에도 남아 있는 100명 미만의 직원들을 대상으로 지난 25일부터 한 달여 간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노조 측은 사실상 ‘강제 퇴출 프로그램’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노조 측은 “이 교육의 성격이 요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간부 사무직 퇴출 전용 프로그램인 PIP(Performance Improvement Plan)교육이라고 판단된다”며 교육 진행 중단을 요구하는 공문을 사측에 보냈지만, 현대중공업 인력개발부장은 답변서에서 “직무역량 향상 교육에 불참하는 인원은 무단 결근으로 처리한다”고 밝혀 새로운 갈등의 도화선이 되고 있다.
노조 측이 PIP교육의 예시로 들고 있는 것은 현대차의 PIP교육이다. 현대차는 2009년부터 3년간 인사평가 결과 하위 1.5%에 해당하는 간부 사원을 대상으로 “업무역량을 높이고 현업에서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며 PIP교육을 하고 있다. 하지만 PIP교육의 실체를 밝히는 보도가 잇따라 터져나오며 ‘토사구팽’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지난 2013년 <SBS>가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현대차는 권고사직을 종용받았으나 그만두지 않는 사람을 선정해 PIP교육을 실시했다. 현대차는 시험점수 및 교육태도를 기준으로 점수를 매기고, 그 점수를 기준으로 대부분의 직원에게 해고·정직·감봉 등 중징계를 줬다. 교육내용도 매일 70~80쪽 분량의 방대한 분량이며 전혀 생소한 내용으로 이뤄져 있고 필기와 레포트를 작성해야 하며 다음 날 시험을 보기 때문에 새벽까지 공부를 해야 한다.
퇴소 후에도 일단위로 업무 계획과 실적을 작성하고 매월 보고서를 작성하며 부서장이 감시와 평가를 진행하고 2차 교육을 또 실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과정이 반복된 후 최종적으로 해고, 정직, 감봉 등의 징계가 단행된다. 보도 당시 한 참가자는 “수업 중 감시자가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데다 빡빡하고 쉽지 않은 교육 내용으로 사람을 지치게 해 스스로 떠나가게 하려는 프로그램으로 보였다”고 평했다.
더구나 이번에 현대중공업은 이번 직무역량향상 프로그램을 인지어스라는 전직(轉職) 지원 민간 업체에 위탁했다. 이는 교육기관 성격부터가 퇴직을 노리고 있는 것 아니냐는 주장의 근거가 되고 있다. 교육 장소 역시 사내 인재교육원이 아닌 위탁 교육장이라 출근을 아예 회사로 할 수 없다. 거부하면 무단결근으로 처리된다.
지난달 현대중공업 노조 관계자는 <시사포커스>와의 통화에서 “회사 측이 남은 희망퇴직 대상자들을 대상들을 쫓아내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할 것”이라며 “버티면 살아남는다는 전례를 남기고 싶지 않아 (PIP교육을 통해) 남은 이들을 쫓아낼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 관계자는 “남은 직원들은 반드시 버텨내겠다는 의지가 강하다”며 끝까지 투쟁할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앞서 PIP교육 논란을 빚었던 현대차 측은 “개발적인 능력 향상 프로그램을 두고 퇴출프로그램이라 칭하는 것은 억울하다”며 “업무평가 부진자를 대상으로 역량을 강화해 현업에서 좀 더 원활한 업무수행을 돕고자 진행하는 교육프로그램”이라며 강제 퇴출 의혹을 부인했다.
실제로 현대차 측에 따르면 지난 2011년 PIP 교육을 통해 해고를 당했다고 판단한 간부사원들이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이 프로그램과 해고가 정당했다고 판결했다.

◆커져만 가는 여진…권오갑 사장 고발까지
이쯤 되자 “원하는 자만 대상으로 한다”던 희망퇴직이 연달아 마무리됐음에도 사태가 수습되기는커녕 강제 퇴출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여진이 확산되고 있는 모양새다. 노조는 지난 16일 여직원 희망퇴직을 단체협약을 위반한 부당 해고행위로 보고 권오갑 사장과 사측 교섭위원 등 4명을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정법 위반 혐의로 대검찰청에 고발했다.
또한 최근 회사 측이 개인 인사를 전혀 반영하지 않고 직원 50여명을 타 부서로 전환 배치한 것에 대해서도 권오갑 사장과 해당 부서장 등 4명을 울산지검에 추가 고발했다. 이는 경북 냉천공장의 업무를 아웃소싱하는 과정에서 조선2야드에서 도장을 담당하는 도장5부 50여명의 노동자를 타 부서로 전출시키고 해당업무를 하청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과 관련된 갈등이다.
노조 관계자는 “회사가 부당 노동행위를 계속 이어갈 경우 단체협약 불이행과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보고 쟁의행위까지 불사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사측 관계자는 “부당 노동행위는 일절 없었다”며 노조 측의 의혹 제기를 일축했다.
노조는 오는 27일 울산광역시 동구 한마음회관 예술관에서 열릴 예정인 현대중공업 주주총회에서 현대BS&C의 일감 몰아주기 의혹도 폭로할 예정이다. 현대중공업 노조는 “현대 BS&C는 주로 현대중공업그룹 중심의 대기업 네트워크 관리와 보안 업무를 맡았다”면서 “현대중공업에서 ERP시스템, 글로벌 통합구매, 식수관리, 품질경영 고객센터 시스템 등을 독식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현대BS&C는 현대중공업의 최대 주주인 정몽준 전 새누리당 의원의 조카 정대선 씨가 지분 100%를 보유한 사장으로 있는 회사다. 정대선 사장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손자로 고 정몽우 현대알루미늄 회장의 3남이다.
노조 측에 따르면 현대BS&C는 2012년 매출의 46%정도가 현대중공업그룹과의 거래에서 발생했다는 점을 근거로 조카 회사에 일감을 몰아줬다는 의혹을 제기할 것으로 보인다. 2008년 정대선 사장이 유시테크 지분 100%를 인수해 범현대가에 보함된 현대BS&C는 이듬 해인 2009년 282억원의 매출액을 기록했지만 2013년에는 1624억원의 매출을 기록, 5배 넘게 늘었고 영업이익 역시 2억원에서 32억원으로 16배나 폭등했다.
SI사업에는 현대중공업 인적자원관리시스템, 현대중공업 저압전동기 통합정보시스템, 현대삼호중공업 ERP 시스템, 한라그룹 IT 공통 플랫폼, 현대오일뱅크 무선보안망 구축 등이 기재돼 있고, IT아웃소싱에는 현대중공업 및 현대종합상사, 현대비앤지스틸의 토탈 IT 아웃소싱과 서울아산병원 의료정보시스템 운영 등이 있다.
여직원 희망퇴직이 사회적인 문제로 확산될 가능성도 남아 있다. 현대중공업은 기존에 생산직이 아닌 사무직으로 한정한 희망퇴직을 진행한 데 이어 여직원 희망퇴직의 대상을 15년 이상 장기근속 중인 고졸, 전문대 출신으로 한정했다.
근속연수 15년 이상이라는 점은 기타 희망퇴직과 큰 차이가 없는 기준이지만, 생산직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잉여 인력’으로 구분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대상에 ‘여직원’, 그것도 능력과 성과를 고려하지 않은 ‘고졸·전문대졸’이라는 학력으로 기준을 삼은 것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다.
여직원 희망퇴직 방침이 발표된 이후 현대중공업은 ‘여성차별’과 ‘학력차별’이라는 논란에 동시에 휘말렸다. 노조는 “여성과 고졸 학력에 차별을 두고 기준을 선정하는 발상 자체도 시대와 역행하는 낡은 사고방식”이라고 반발했고, 한 누리꾼은 “분명히 회사에 기여하는 바가 있으니 15년 이상 장기 근속을 해올 수 있었을텐데 여사원이라고 해서, 학력이 4년제 대학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희망퇴직 대상자로 선정하는 것은 여성 차별로 인한 낙인 효과를 유발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 시사포커스 / 김종백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