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차 노사가 임단협에서 좀처럼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갑작스러운 ‘전 계열사 임금피크제 도입’ 카드를 놓고 노사가 또 한 판 붙을 태세다.
13일 현대차그룹에 따르면 지난 11일 현대차그룹은 “만 60살 정년이 의무화되는 내년부터 41개 전체 계열사에 임금피크제를 도입키로 했다”고 밝혀 큰 주목을 받았다. 현대차는 “계열사별로 노동조합에 속하지 않은 관리직을 중심으로 우선 시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현재 사측과 임단협을 진행하고 있는 노조 측은 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밝혀 향후 임단협 과정에서 또 다른 갈등의 불씨가 될 전망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현대차 대표이사인가”
가뜩이나 르노삼성·쌍용차·한국GM 등 다른 완성차 업체들이 이미 임단협을 조인한 상황에서 현대차는 아직 합의점을 전혀 찾지 못하고 있고 기아차는 아예 상견례도 갖지 못한 상황이라, 향후 임금피크제 갈등까지 더해져 임단협이 장기화될 경우 심각한 타격이 우려된다.
이 같은 우려는 즉시 현실화되고 있는 모양새다. ‘전 계열사 임금피크제 도입’ 카드가 발표된 당일 울산공장 아반떼룸에서는 윤갑한 현대차 사장, 이경훈 노조 위원장 등 노사 교섭대표들이 참석한 16차 임단협이 열렸다. 여름 휴가 기간 이후 처음이던 이날 교섭에는 사측 34명, 노조 측 32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윤갑한 사장은 노조가 그간 통상임금 확대가 사회적 추세라고 주장해 왔던 것을 상기시키며 “임금피크제 역시 사회적 추세”라고 당위성을 역설했다. 하지만 노조는 이날 교섭에서 “회사를 위해 평생을 바친 장기근속 조합원의 노고를 인정하라”며 임금피크제 시행을 거부한 상태다.
특히 노조 측은 “노사 간 단체교섭을 진행하고 있는 상황인 오늘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겠다는 사측의 발표는 조합 차원에서 절대 묵과할 수 없다”면서 방법론적인 비판도 곁들였다.
아울러 이경훈 위원장은 “박근혜 대통령이 현대차 대표이사인가”라며 비난의 수위를 높였다. 노동 개혁을 국정 주요 과제로 삼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 및 여당이 청년실업 해소와 노동시장 2중구조 문제 등의 해결책으로 취업규칙 변경, 파견 확대 등과 더불어 임금피크제 도입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을 노조와의 합의도 없이 그대로 따랐다는 지적이다.
더구나 노조 측에서는 아직 공기업들도 임금피크제 도입을 위해 공감대 형성에 몰두하고 있는 마당에 사기업인 현대차가 먼저 대대적인 임금피크제 도입 방침을 밝힌 것에도 유감을 표시했다.
◆사실상의 임금삭감 예상

특히 이날 양측은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임단협 논의에 들어갔지만 임금피크제 도입의 구체적 내용이 나오면 다시 갈등 구도가 형성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현재 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 등 현대차그룹의 자동차 계열사들은 사실상 임금피크제를 시행하고 있기는 하다. 만 58세의 정년이 지나도 건강상 문제가 없으면 정년 후 2년간 추가 근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년 후에는 임금이 유지되고 다음 해에는 임금이 10% 삭감되는 형식으로 근로자들은 만 60세까지 근무할 수 있다. ‘사실상의 임금피크제’라는 표현은 여기서 비롯된다. 현대건설과 현대엔지니어링 노사 역시 유사한 내용에 합의한 바 있다.
현대차 측은 “단협과 취업규칙상 명시적인 정년이 만 58세로 돼 있어 이러한 규정을 손보고 이에 따라 임금을 조정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2013년 국회에서 통과된 ‘고용상 연력차별 금지 및 고령자 고용 촉진법’ 개정안에 따라 내년부터 노동자 300명 이상 사업장은 정년을 만60세 이상으로 정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라는 얘기다. 내용과 도입 방식은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상태라 노조도 공식적인 반응을 내놓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다만 현대차가 임금피크제 도입으로 추가 인건비 부담을 경감해 연간 1000명 이상의 청년 고용 확대를 추진키로 했다는 점은 사실상의 임금삭감이 수반될 가능성을 예상케 한다. 2012년 이후 노사 간의 임단협에서 사측이 노조를 상대로 임금피크제 도입을 공식적으로 요구한 데 대해 노조가 거부해 왔던 것도 노조가 사실상의 임금삭감에 해당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타 기업 사례 적용시 상당한 삭감폭 불가피
구체적으로는 임금피크제 개시 연령을 현재보다 낮추는 방안이 유력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고용노동부 발표 자료에 따르면 30대 그룹의 주력 기업 48개의 임금피크제 개시 연령(임금 감액 개시 연령)은 만56세가 37.5%로 가장 많았고 만57세는 16.7%로 만58세(29.2%)에 이어 세 번째였다. 만59세는 12.5%다.
현재 현대차 근로자들은 만60세에 10%의 임금이 삭감되는 데 그치고 있는 것과 큰 차이다. 현재보다 낮은 만56~59세에 개시되는 비율이 95.9%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사측이 임금피크제를 공식적으로 적용할 경우 임금 삭감은 거의 기정사실이나 다름 없는 셈이다.
이 기업들의 연력별 감액 비율은 만 56세에 10%, 만57세에 19%, 만58세에 27%, 만59세에 34%를 선택한 경우가 가장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현재 만 55세부터 만59세까지 임금이 동일하게 유지된다고 가정할 경우 임금피크제의 공식 적용 후 이 비율을 그대로 적용하면 만59세가 됐을 때의 임금은 만55세의 35%에 그친다.
임금피크제를 공식적으로 적용하지 않았을 경우에 비해 65%가 삭감되는 셈이다. 현대차 근로자들의 2014년 회계연도 1인당 평균 급여는 1억원에 가까운 9700만원으로 10대 그룹 중 단연 최고를 차지했다.
물론 임금 상승 등이나 개별적인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단순 계산에 불과하지만 상당한 폭의 임금 삭감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도 만60세까지 근무할 수 있고 공기업을 포함한 다른 대부분의 기업들도 아직 논의를 진행중인 곳이 많은데 굳이 사측이 임금피크제를 일방적으로 공식적으로 도입하겠다는 발표를 내놓은 것에 대해 노조가 반발하는 이유로 풀이된다. 전 계열사가 임금피크제를 도입키로 합의한 곳은 30대 그룹 중에서 삼성그룹 정도다.

◆쟁점 많은 올해, 또 파업 가나
어차피 임금피크제도 노사간의 합의 없이는 사실상 시행이 불가능하지만 이처럼 노조가 구체적 내용을 접하기 전부터 반발 움직임을 보이면서 현대차 노사 간의 임단협은 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들 조짐이 감지된다. 민간 기업의 경우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단체협약 및 취업규칙을 고쳐야 하기 때문에 노조원 절반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현대차 노사는 지난 6월 2일 상견례 후 매주 2차례 교섭을 진행해 왔지만 입장차는 여전한 상태다.
노조는 올해 임금 15만9900원(기본급 대비 7.84%) 인상, 당기순이익의 30%를 성과급으로 지급, 통상임금 범위 확대, 주간 2교대 8+8시간 조기 시행, 월급제 시행, 국내공장 신·증설 즉시 검토, 해외공장 생산량 노사 합의, 해고자 원직복직, 정년 65세 연장 등 총 60개 사항을 사측에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협의된 부분은 아무 것도 없다. 특히 최대의 쟁점이 되고 있는 통상임금 등을 다루고 있는 ‘임금체계 및 통상임금 개선위원회’(이하 임개위)에서도 전혀 진척이 없는 상태다. 사측은 지난달 30일 임개위 8차 본회의에서 전체 상여금 750% 가운데 450%를 통상임금에 포함하겠다는 내용과 호봉제 폐지, 차등임금제 도입 등을 제시했지만 노조는 분명한 거부 의사를 밝혔다. 양측의 의견이 조율이 전혀 되지 않는 상태다.
또한 사측은 국내 공장 신·증설 요구나 해외 공장 생산량 합의 등에 대해서는 경영 사항이라며 난색을 표하고 있는 상태다. 법원이 연초 사내 하청 근로자들 정규직 지위를 인정하면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놓고도 갈등이 일고 있다.
여기에 임금피크제 갈등까지 더해질 경우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파업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현대차 노조는 지난해 통상임금 문제로 임금 협상에 난항을 겪으면서 6차례의 부분 파업을 실시했다.
◆노사 모두 부담…일각서는 빅딜설도
이 경우 가뜩이나 엔저 장기화와 내수 부진에 따른 위기를 겪고 있는 현대차로서는 상당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현대차가 지난 3년간 매년 진행된 파업을 통해 입은 생산손실은 모두 3조6464억원 가량으로 추정된다.
현대차는 생산 중단으로 인해 2012년 1조7048억원(8만2088대), 2013년 1조225억원(5만191대), 2014년 9191억원(4만2293대)의 손실을 입었다고 밝힌 바 있다. 올해 상반기 현대차의 영업이익이 3조3389억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만만치 않은 규모다.
여기에 330여개의 1차 협력사는 물론 5000여개의 2차·3차 협력사로까지 피해가 확산된다. 현대차 노조가 파업할 경우 부품업체들의 하루 손실액은 9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대차 노조는 1987년 노조가 설립된 뒤 2009~2011년의 3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파업을 해 왔다.
논의가 내부를 넘어 노동계와 정계까지 확대되는 것도 부담이다. 노동계의 현안들은 대부분 국내 최대 단일 사업장인 현대차의 향방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차가 임금피크제를 발표한 다음 날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현대차가 임금피크제를 도입해 청년 고용을 확대키로 했다”면서 현대차의 사례를 들어 기업들의 노동개혁 노력을 촉구했다. 원유철 원내대표도 “현대차그룹이 노조와의 원만한 협상을 통해 좋은 표본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반면 새정치민주연합과 노동계는 노조와의 협의가 없었던 현대차의 임금피크제 추진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다.
하지만 어차피 내년부터 임금피크제 도입이 의무화되는 만큼 노조 측도 무조건 반대만 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일각에서는 ‘빅딜’이 이뤄지지 않겠느냐는 예측도 나온다. 양측이 첨예하게 맞붙고 있는 최대 쟁점인 통상임금 범위 확대, 비정규직의 정규직 완전 전환에 임금피크제 도입이 새롭게 가세할 예정인 만큼 노조가 어차피 적용해야 할 임금피크제를 최소화하는 선에서 양보하는 대신 통상임금 범위 확대를 강력히 요구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다. 불황으로 자동차 업계가 신음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 강성 노조에 대한 비판 여론도 무시하기 어렵다.
현대차 노사는 임단협 타결을 위해 내주부터 주3회 집중 교섭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임개위 역시 임단협과 함께 진행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비정규직 노조가 포함된 특별교섭도 재개될 전망이다.
지난해 현대차 노사는 8~9월 파업을 거쳐 10월에서야 임단협을 타결했다. 2013년과 2012년에는 모두 9월에 조인식을 가졌다. 현대차 노사가 내주부터 집중 교섭 기간에 돌입하는 만큼 어떤 결과가 나올지 업계는 물론 정·재계와 노동계도 협상 결과에 주목할 것으로 보인다. [ 시사포커스 / 김종백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