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일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식 당시 ‘김원봉 발언’이 오랜만에 색깔론에 불을 지피면서 안 그래도 꼬여있는 여야 관계를 더욱 극과 극으로 치닫게 만들고 있다.
논란이 격화되자 청와대에선 ‘정파와 이념을 뛰어넘어 통합으로 가자는 취지’였다고 해명했지만 우리 역사에서 통합을 상징할 만한 역사 인물이 과연 김원봉뿐이었는지, 도리어 논란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굳이 그를 꼽은 건 아니었는지 여전히 석연찮은 의문이 남는다.
역사적으로 3.1 독립선언서 초안을 만든 것으로 알려진 최남선조차 말년에 변절해 친일 행각을 했던 점 때문에 해방 직후 반민특위에 체포되고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됐었으며 한국문학사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을 쓴 이광수도 상해에서 창간된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초대 사장 겸 주필을 맡고 안창호가 이끌던 흥사단에도 가입했었지만 결국 친일인사로 돌아서 그 역시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된 바 있다.
즉, 아무리 독립운동 전력이 있었다 한들 향후 행보에 있어 문제가 있다면 그런 인물은 공식 석상에서 거론하는 자체가 신중할 수밖에 없는 게 상식인데, 김원봉은 의열단 활동이나 광복군 부사령관을 맡았던 부분 때문에 독립운동가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해방 이후 월북해 북한 정권 수립 당시 국회의원격인 제1기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맡았고 6·25전후로 국가검열상과 노동상에 임명된 데 이어 김일성으로부터 6.25 공훈자 훈장까지 받은 인물이란 점에서 호국보훈의 달에 현충일 추념식에서 언급해야 되는 인물로는 누가 봐도 부적절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문 대통령은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동족상잔의 전쟁인 6.25에 대해선 유족들이 여전히 살아있는데도 불구하고 친일을 비판하던 때의 시각과 달리 상당히 온정적이며 화합이나 통합적 차원에서 바라봐야 할 부분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해 그 인식에 우려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모습은 천안함 폭침 사건과 연평도 포격 도발 유족들을 초청한 청와대 오찬에서도 분명히 드러났는데,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유족의 심정에 공감해 울먹이던 문 대통령의 그 세심한 배려와 감수성은 어디로 갔는지 북한의 도발로 전사한 이들의 유족에게 나눠준 책자에 김정은이 문 대통령과 백두산에서 손을 맞잡고 있는 사진이나 평양에서 집단체조를 관람하며 찍은 사진을 담아놓는 행태를 보였다.
아무리 대통령이 말로는 국가유공자들을 이전보다 더 살피고 보훈을 중시하겠다고 해도 이처럼 진정성이 없는 행동 하나 하나에 유족들은 더 큰 상처를 받게 된다는 걸 진정 모르는 것인가.
불과 몇 달 전 3·1절 기념사에선 이른바 ‘빨갱이’ 발언, 5·18 기념사에선 ‘독재자의 후예’란 분열의 언어를 택한 데 이어 이번엔 6.25 전사자들이 잠든 현충원에서 6.25 전쟁 당시 군사위원회 평북도 전권대표로 활약했던 김원봉을 언급한 것은 대체 무엇을 노리고 꺼낸 발언인지 그 저의가 의심될 정도다.
이번 논란과 관련해 혹자는 주체사상을 정립했던 고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도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은 판국에 오히려 1958년 연안파 제거작업을 통해 김일성 일파에게 숙청당한 김원봉이 문제될 게 있느냐는 반응도 보이고 있는데다 일부 정당에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과거 남로당 군사총책 전력을 꼬집어서까지 비교하고 있는데 애당초 전향한 적 없이 북한 권력 서열 3위로서 권력투쟁을 하다가 숙청됐을 뿐인 인물을, 확실하게 전향하고 대한민국을 위해 여생을 바친 황 전 비서나 박 전 대통령과 견준다는 자체가 온당하다고 보는가.
지난해 프랑스에서도 마크롱 대통령이 1차 대전 당시엔 베르됭에서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등 전쟁 영웅이었으나 2차대전 때는 나치독일에 협력해 비시프랑스란 괴뢰정권을 세웠던 필리프 페탱 장군을 ‘위대한 군인’이라며 1차대전 승전 100주년 기념식 추모대상에 포함시키려했다가 각계의 반발과 비판을 받은 끝에 결국 공식 추모대상에서 제외시킨 바 있다.
설령 훌륭한 ‘과거의 공적’이 있다고 해도 나치에 부역한 ‘이후의 행적’에 더 무게를 두고 서방 선진국에서도 이처럼 재론의 여지없이 엄정한 평가가 내려지고 있는데, 1차 대전과 달리 참전용사도 여전히 일부 생존해 있는 6.25에 연루된 김원봉을 문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언급한 것은 본인의 직위나 추념식 성격에 비추어 지금이라도 발언을 철회하고 사과해야 될 게 아닌지 따져 묻고 싶다.
지금도 청와대에선 정작 논란은 스스로 일으켜 놓고 정치권이 계속 들끓게 되니 '김원봉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학계에서 해야 될 문제'라고 반성 없이 슬며시 회피하고 있는데, 당초 학계의 영역에서 판단해야 될 인물을 그렇다면 왜 대통령 본인이 단정적으로 ‘통합을 상징하는 인물’이라 재단해 거론한 것인지 그 자가당착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진정 문 대통령이 통합을 생각한다면 역설적이게도 좌우 이념 논란이나 국론분열만 촉발시키는 단어와 문제의 인물만 거론할 게 아니라 장차 대한민국 국민이 하나같이 공감하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안이나 용어부터 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7일 발표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사회통합 실태 진단 및 대응방안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6~9월 전국 성인 3873명을 대상으로 실시된 대면 면접에서 ‘통일 문제와 경제 문제 중 하나를 골라 해결해야 한다면 경제 문제를 택하겠다’고 답변한 이가 77.1%로 집계됐을 만큼 당장 국민 공통 관심사는 통일보다 경제다.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경제상황 속에서 왜 국민들이 공감할 만한 통합적 관심사가 아니라 갈등만 일으킬 과거 인물을 거론한 것인지 문 대통령은 이제라도 자성하고 스스로 돌이켜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