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항공이 승객의 기내 면세품 구입시 부정 신용카드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운영중인 시스템에 대해 조종사들 내부에서 안전운행 저해, 개인정보 유출 등의 우려가 제기돼 대한항공의 안전불감증이 질타를 받고 있다.
지난 21일 대한항공 조종사 노동조합 게시판에는 “기판 카드 정보 ACARS 송신”이라는 제목의 게시글이 올라왔다. 게시글을 올린 ‘부기장’이라는 닉네임의 조종사는 이 게시글에서 “ACARS 메시지를 가로채 것이 어렵지 않은 상황에서 타회사 물건을 팔아주는 기판(기내판매)을 통해 신용카드 정보를 넘겨주고 있는 우리 승객분들은 이 사실을 알까요?”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ACARS란 ‘ARNIC Communication Addressing & Reporting System’의 줄임말로 ARINC사가 운용하고 있는 ‘지상과 운항중 항공기간 데이터 통신을 위한 시스템’을 가리킨다. ACARS 시스템으로 항공기 운항에 대한 제반 보고사항을 지상에 제공하고 필요정보를 지상으로부터 받는 것이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ACARS 시스템은 항공기의 비행 중에 항공로상의 기상정보나 비행계획 변경통보 등의 업무 연락에 주로 사용된다.
노조 게시판에 올라온 불만은 대한항공이 이 ACARS 시스템을 기내 면세품 판매 과정의 부정 신용카드 방지에 동원하면서 수반되는 우려를 담고 있다.
이 조종사는 “전세계에서 ACARS로 카드 번호 조회하고 앉아 있는 회사가 어디에 있느냐”며 “왜 우리가 우리 회사도 아니고 다른 타회사 물건을 대신 팔아주면서 대한항공의 금전과 통신자원을 낭비해야 하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카드사고 방지”?…오히려 카드정보 관리 실태 허술
이는 지난해부터 대한항공이 비행중인 기내에서 500달러 이상의 면세품을 판매할 때 신용카드 번호, 카드번호, 유효일자 등을 승객으로부터 제출받아 조종사들에게 ACARS 시스템을 통해 지상에 부정 카드 여부를 확인하고 있는 절차를 지적하는 대목이다.
대한항공은 지난해 7월 “기내 결제 수단에 불량신용카드로 등록되지 않은 신용카드에 대해 조회 정보를 기내에서 지상(본사)으로 연락을 취해 실시간에 가깝게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한 바 있다. 기존에는 출발 전에 기내 신용카드 결제 기기 내에 불량 신용카드번호를 직접 등재해 확인했지만, 기내에서 결제가 이뤄질 때 실시간으로 부정 사용 여부를 조회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조종사의 지적처럼 기내에서 신용카드 정보를 서면으로 제출받아 조회를 의뢰하는 절차는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우려를 낳고 있다. ‘보이스피싱’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한 한 조종사는 “포스트잇에 카드번호와 함께 유효기간을 적어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는데 유출되서 불법 사용되면 어떻게 하느냐”며 “승객들도 이걸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ACARS 시스템의 보안 취약성에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부기장’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조종사가 지적했듯이 ACARS 시스템은 보안성이 크게 뛰어난 편이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2013년 영국 언론은 한 실험에서 스마트폰으로 ACARS를 조작하는 방법을 통해 가짜 정보를 항공기에 전송할 수 있고 악성코드를 설치해 조종사가 보는 계기판의 고도·방향·속도 등을 임의로 조작하는 일도 가능하다는 연구결과를 보도하기도 했다.
따라서 ACARS를 통해 조종사가 승무원이 가져온 카드 정보를 지상으로 전송하는 과정에서 해당 조회 요청 메시지가 해킹이라도 당할 경우 부정한 일에 쓰일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이다.
수 년간 잇따른 신용카드 정보 유출 파문으로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가는 가운데 이 같은 조회 절차는 많은 우려를 낳고 있다. 신용카드 번호와 유효기간 등만으로도 결제가 가능한 경우가 많고, 비밀번호 등까지 유출되면 카드의 위·변조까지도 가능하다. 아울러 유출된 정보를 활용한 보이스피싱·스미싱 가능성도 제기된다.

◆“당신의 조종사는 신용카드 조회 중입니다”
아울러 기내 면세품 판매가 타회사 물건을 팔아주는 것이라는 지적은 최근 공정거래위원회의 ‘일감 몰아주기’ 규제의 첫 대상으로 지목된 조현아 삼남매의 오너 회사 ‘싸이버스카이’와 연관된 지적이다.
싸이버스카이는 한진그룹 계열사로 대한항공 기내에 비치되는 잡지의 광고와 기내 면세품 통신판매를 독점하고 있으며, 조양호 회장의 장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등 삼남매가 각각 33.3%씩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이 같은 이유로 싸이버스카이는 지난 2월 본격적으로 시행된 일감몰아주기 규제법의 첫 조사대상으로 올랐다. 아울러 과거에도 승무원들의 인사고과에 기내 면세품 판매 실적을 반영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개인 회사를 키우기 위해 격무에 시달리는 승무원들을 동원한다는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과거에는 승무원들의 기내 면세품 판매에 동원되는 것에 대한 질타가 나왔지만, 조종사들이 신용카드 조회 작업에 동원되면서 조종사들의 불만도 터져나오고 있다.
지난 15일 ‘사이버스카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조종사는 노조 게시판에 “조종사가 기업 총수의 세 자녀의 회사를 위해 면세품을 구매한 신용카드 번호를 조회하느라 비행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전 국민이 알았으면 좋겠다”며 “겉으로는 비행안전, 하지만 당신의 조종사는 지금 비행 대신 신용카드 조회 중입니다”라고 꼬집었다.
이 게시글에는 많은 조종사들의 공감 댓글이 달렸다. 한 조종사는 “신용카드 조회는 시간 충분하면 바쁘지 않은 구간에서 그냥 해줄 수도 있지만, 짧은 중국 비행 중에 1만피트 이하에서 몇 번 콜 오고 랜딩하자마자 활주로 개방하는 중에 콜하는 승무원들은 항공안전에 큰 위협이 된다”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다른 조종사는 “(승객이) 500불 이상 기내에서 면세품을 팔아주는데도 신용도를 조사당한다”고 지적했고 다른 조종사는 “안전운항이 최고인데 그놈의 카드 조회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꼬집었다.
‘운항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한 한 조종사는 지난 23일 사측에 질의한 내용을 공개했다. 이 조종사는 지난해 대한항공이 공지를 통해 “ACARS는 비용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최적의 경비 운용을 위해 환자 발생, HF 통신 불가, 비행안전 관련 OCC 협의, DIVERT 협의 등 운항에 필요한 경우에만 사용해 달라”고 알린 것을 문제삼았다.
이 조종사는 “ACARS를 통한 날씨 조회 등을 무분별하게 사용하지 말라는 것 아니냐”면서 “운항업무와 무관한 ACARS 신용카드 조회를 각 카드별로 한번씩 보내는 것은 비용이 절감되느냐”고 지적했다. 그는 “안전비행에 직결된 기상은 예보 업데이트 시간에 맞춰 시간 확인하면서 누르고 안전운항과 전혀 무관한 카드 조회는 순항중이라면 몇 개라도 일일이 요청해야 한다”면서 “승무공지에 ACARS로 신용카드 조회하는 것은 예외 조항인가”라고 반문했다.
지난 3월에 ‘탱자’라는 조종사가 올린 글에서도 불만이 제기됐다. 이 조종사는 “재주는 누가 부리고 돈을 누가 가져가고...”라면서 “몇 몇 주간 비행 노선은 이륙에서 착륙까지 정말 기판만 하다 끝난다”면서 “(조양호 회장의) 자녀들 소유 회사를 왜 우리의 노동력으로 벌어 먹여야 하느냐”라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어차피 기내에서는 실시간 결제가 불가능한데 굳이 조종사들에게 부담을 지우면서까지 카드정보를 실시간으로 조회해야 하냐는 지적도 나온다. 기내에서 카드로 결제하면 3시간 가량 지나야 카드사로부터 결제 승인이 이뤄진다. 또한 정지카드로 면세품을 사서 항공사가 피해를 보면 매일 정지사용카드 명단을 넘겨주는 카드사로부터 보상을 받게 된다.

◆대한항공 “논의되는 개선책 없어”
대한항공 관계자는 이날 <시사포커스>와의 통화에서 “항공안전과 관련해 ACARS를 통한 신용카드 조회 작업에 대한 조종사들의 불만이 나오고 있는 것은 알고 있다”고 답했다.
이 관계자는 “사측에서는 되도록 운항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상황에서 해달라고 부탁드리고 있다”면서도 “조종사분들 입장에서는 승무원들의 지속적인 요청이 운항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현재 조종사 노조 측과 이 부분에 대해 협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도 불만이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는 부분에 대한 개선책에 대해서는 “딱히 논의되고 있는 것은 없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짧은 시간 안에 조회가 이뤄지는데 신용도까지 조사가 되겠느냐”면서도 “정확히 무슨 내용이 조회되고 통보되는지는 알지 못하고, 실제 적발 실적에 대한 통계도 딱히 수집된 게 없다”고 설명했다. 이 부분은 별다른 적발 실적도 없으면서 조종사들을 격무로 내몰아 항공안전을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될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신용카드 정보 유출 우려와 관련해서도 그는 “딱히 고객의 신용카드 정보가 표기된 종이를 관리하는 매뉴얼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고, ACARS 시스템의 보안 우려에 대해서도 “따로 얘기할 부분이 없다”고 말해 안전불감증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 시사포커스 / 김종백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