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유가가 6년 내 최저치를 기록, 배럴당 30달러대를 목전에 두면서 미국의 셰일원유 산업을 무너뜨리겠다는 OPEC의 계획이 무산되는 모양새가 나오고 있다.
16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NYMEX)의 4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 원유(WTI)는 전일 대비 0.96달러(2.1%) 하락한 배럴당 43.88달러로 마감, 지난 2009년 3월 이후 6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런던 ICE거래소에서 거래되는 4월 인도분 브렌트유 선물도 1.23달러(2.3%) 하락한 배럴당 53.44달러로 마감했다.
이는 최근 유가 하락세가 주춤하고 상승세로 전환하는 흐름이 지속될 것이라는 분석이 잇따라 제기된 것과 정반대의 흐름이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끄는 OPEC(석유수출국기구)은 이날 “미국의 원유시추장비수가 줄어드는 것을 감안할 때 올 연말쯤 미국의 셰일 원유 생산에 차질이 생겨 원유생산이 줄어들 것”이라는 낙관적 수급전망을 내놓긴 했지만 원유시장은 OPEC의 발언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 주 미국이 주도하는 IEA(국제에너지기구)가 “미국의 셰일오일 산업은 굳건하다”며 “미국의 원유생산은 계속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한 것에 대한 영향이 더 큰 모양새다.
◆살아남은 셰일원유, OPEC 외면받기 시작
지난해 11월 알리 알나이미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은 본격적으로 셰일원유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유가가 배럴당 20달러로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시장 점유율을 OPEC 이외의 국가에 내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미국 셰일원유 산업의 생명력은 OPEC의 예상보다 더 질긴 듯하다. 셰일원유 기업들이 구조조정과 기술 개발 등을 통해 생산량을 줄이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이다.
미국 셰일원유의 생산비는 현재 배럴당 평균 57달러로, 중동산 원유의 배럴당 평균 30달러보다 두 배 가량 높다. 비싸게 생산한 원유를 싸게 팔아야 했던 미국 셰일원유 기업들의 수지는 악화됐고 굴착기 수도 지난해 10월에 비해 절반 가량 감소했다. 셰일원유 채굴 기업들은 자본 투자를 20~70% 줄일 것으로 전망됐고, 이런 요인들은 유가가 ‘반짝’ 재상승하는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OPEC의 예상과는 달리 수지 악화, 투자 축소에도 불구하고 셰일원유 생산량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미국 최대 셰일원유 생산지대인 텍사스주 퍼미언은 석유 생산량을 하루에 200만배럴까지 늘렸다. 투자를 40% 축소하기로 한 셰일원유 기업 마라톤오일은 올해 들어 생산량을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 늘렸다. 투자가 14% 감소한 헤스오일의 생산량도 14% 증가했다
이는 셰일원유 사업이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1년간 셰일 유정당 원유 생산량은 24~30% 증가했고, 관련 기자재 수요 감소로 장비 이용료가 20~30% 정도 하락한 것도 셰일원유 기업들에 도움이 되고 있다.

◆뇌관 된 이란 핵협상, 공급과잉 무게 실려
셰일원유 산업이 예상보다 강한 생명력으로 잘 버티고 있는 가운데 국제적인 요인들도 유가 추가 하락 가능성에 무게를 싣고 있다. 당장 오는 31일로 시한이 만료될 이란의 핵협상은 메가톤급 후폭풍을 몰고올 전망이다.
이란 석유산업은 2012년 이란 석유에 대한 직접적인 제재가 시작된 이후 원유 판매량이 크게 줄었고 일부 생산시설은 가동을 중단했다. 하지만 조만간 핵협상이 타결돼 제재가 해제되면 곧바로 증산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제재 후 외국계 석유회사의 철수와 시설 관리 부실 등 아직 생산능력 회복에 대한 물음표가 남아 있지만, IEA는 이란이 교묘하게 제재를 회피하면서 시설 상태를 최상으로 관리해왔다고 전했다. 앞서 비잔 잔가네 이란 석유장관은 제재 후 수개월 내로 하루 100만배럴을 더 수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현재 미국과 이란은 지난 15일부터 스위스에서 핵 문제 논의를 재개한 상태다.
원유 공급 증가 소식도 잇따라 들려오고 잇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지난 주 오클라호마 쿠싱 원유 재고는 300만 배럴 증가했다. 미국 원유 재고는 10주 연속으로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는 상태다. 아울러 리비아 원유 생산량도 몇 주 전에 비해 두 배가량 증가한 하루 49만배럴로 늘어 유가 재하락에 힘을 싣고 있다. 바야흐로 세계적으로 원유 공급량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강달러도 유가 하락에 또 다른 배경이 되고 있다. 달러로 표시되는 석유 가격의 특성상 강달러가 지속되면 필요한 현지 금액이 줄어들게 된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현재 유로화와 등가 수준에 근접한 달러화가 오름세를 지속, 내년 말에는 유로당 80센트 수준까지 가치가 올라갈 것으로 전망된다.
◆OPEC 무너지나…당분간 저유가 지속될 듯
잠깐이나마 ‘반짝’하던 국제 유가 오름세가 다시 곤두박질치기 시작하자 OPEC 회원국 간 갈등도 커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저유가로 고통받고 있는 OPEC 회원국 간 결속력이 약화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외환 보유액이 충분치 않은 중남미·아프리카 회원국들은 감산을 원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국제통화기금(IMF)는 베네수엘라가 배럴당 120달러 선은 돼야 파산을 면할 수 있다고 분석했고, 나이지리아는 올해 배럴당 78달러를 기준으로 예산안을 수립했다. 지난 10일 세계은행은 OPEC회원국 간의 갈등이 누적돼 조만간 원유가격 카르텔이 붕괴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결국 셰일원유 산업을 붕괴시키겠다는 OPEC의 야심찬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징후가 곳곳에서 감지되면서 향후 국제 시장의 저유가 기조는 상당 기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배럴당 30달러대 유가가 현실화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고 있다. 다음 저항선은 2008년 12월 저점인 32.40달러가 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미국발 셰일혁명은 현재까지 OPEC에 완승을 거두고 있다. [ 시사포커스 / 김종백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