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5월 14일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이 반도체 사업장에서 일하던 직원 중 일부가 백혈병 등 난치병을 얻은 뒤 사망한 일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당사자와 가족에게 합당한 보상 하겠다”고 말한 지 1년이 지났다. 조정위원회는 내달 삼성전자와 유가족 간 의견을 반영한 권고안을 내놓을 것이라고 예고했다.
15일 조정위는 각 주체들의 입장과 요구사항의 합리성, 논리성 등을 따져보기 위해 이달 말까지 산업보건분야와 법률 분야 전문가의 자문을 받은 뒤 오는 6월 내 권고안을 작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조정위가 가리키는 각 주체란 삼성전자,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 삼성직업병피해자가족대책위원회(가족위) 등 3곳이다.
이날 반올림 관계자는 <시사포커스>와의 통화에서 “6월 결과 기다리는 중”이라고 말했다.

◆ 故 황유미씨 아버지, 8년간 ‘계란으로 바위치기’
‘반올림’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라는 단체의 시작은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던 故 황유미씨가 2007년 3월 6일 백혈병으로 사망한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부터였다.
이 해 11월 각계 시민사회 단체와 노동단체들이 힘을 합쳐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 규병과 노동 기본권 확보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만들었고 다음 해 2월 지금의 ‘반올림’으로 이름을 바꿔 활동을 본격화 했다.
이후 많은 피해자 및 유가족이 반올림과 함께하기 시작했고, 집단 산재신청과 행정소송, 기자회견 등으로 문제제기를 이어갔다. 이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사망한 故 황유미 씨와 故 이숙영 씨의 산재가 지난해 사망한지 7년의 시간이 지나서야 최종 인정됐다.
강원도 속초에서 택시운전을 하던 故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는 딸의 죽은 후 8년간 삼성전자와 싸워오고 있다. 딸이 어떤 물질 때문에 왜 죽어야 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어달라는 것과 제 2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 아버지 황 씨가 끊임없이 요구해온 부분이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피해자들을 산재처리해주는 등 금전적 보상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으면서도 반도체 근무 환경과 백혈병의 과학적 인과 관계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근본적인 문제 해결책은 내놓지 않고 있다.
◆ “故 조은주, 제2의 황유미” 개탄
이 와중에 故 황유미씨의 8주기를 앞두고 지난달 2월 10일 삼성전자에서 일하던 故 조은주 씨가 입사 3년 만에 골수이형성증후군(혈액암)으로 숨을 거뒀다. 올해 故 조은주씨의 나이는 24살이었다.
앞서 2010년 7월 삼성전자 천안사업장에 입사한 조 씨는 대형 LCD TV 불량검사 작업을 통해 선별된 불량품들을 약품으로 닦아내는 일을 담당했다. 유가족에 따르면 조 씨는 입사 이후 줄곧 과다 업무 등에 시달렸고, 입사한지 3년만인 2013년 9월 근무 중 고열과 입술 파래짐, 피부 발진 등 이상 증상을 보여 병원을 찾은 뒤 혈액암 진단을 받았다. 이후 항암치료를 받아오다 병세가 급격하게 악화돼 골수 이식을 앞두고 숨을 거뒀다.
이에 지난 2월 16일 반올림은 보도자료를 통해 조 씨의 사망을 알리면서 “8년 전 세상을 떠난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망노동자 고(故) 황유미 씨와 똑같은 죽음이 8년 동안 이어져 왔고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현실이 너무 개탄스럽다”고 말했다.
당시 반올림은 조 씨가 삼성전자로부터 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 확답할 수 없다고 언급했다. 조 씨는 병원에서 검사를 받을 때마다 골수이형성증후군, 혈구탐식성림프조직구증 등 다른 결과를 통보 받았는데, 이것은 삼성전자가 보상 질병목록에 골수이형성증후군은 포함시키고 있지만 혈구탐식성림프조직구증은 넣지 않은 것에 걸리는 부분이다.
이와 관련해 반올림 관계자는 “삼성전자는 보상 대상 질병을 굉장히 협소하게 정해서 같은 계통이지만 약간의 차이로 어떤 질병은 보상 대상에서 제외 된다”고 설명했다.
반올림의 이 같은 주장에 삼성전자는 지난 1월 협상에서 뇌종양과 유방암 포함, 백혈병, 비호지킨림프종, 재생불량성빈혈, 다발성골수종 등 모든 종류의 혈액암을 보상 대상으로 삼겠다고 발표했다.

◆ 보상 범위‧근로기간 ‘답보상태’
그러나 반올림, 가족위와의 의견 합의는 여전히 답보 상태다. 반올림은 보상 대상에 모든 암, 천암성 질환, 희귀난치성 질환, 자연유산이나 선천성 기형 등 생식보건 문제까지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가족위도 삼성전자가 제시한 보상 범위 외에 생식기 암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조건 중 ‘근로기간’에서도 삼성전자-반올림‧가족위 간 이견이 있었다. 삼성전자는 근속 중인 근로자는 모두 보상하지만, 퇴직자의 경우 혈액암이 걸렸다면 생산라인에서 1년 이상 뇌졸증과 유방암은 생산라인에서 5년이상 근무했어야 하고 퇴직 후 10년 이내 발병자로 보상범위를 제안했다.
하지만 반올림은 3개월 이상 근무자(생산라인 외 사업장 주변 사무직 포함)라면 퇴직 후 20년까지 보상해줘야 한다는 입장이고, 가족위는 현직 근로자는 근로기간에 제한 없이 보상하되 퇴직자의 경우 이전에 1년 이상 생산라인에서 근무했다면 퇴직 후 12년 이내 발병자는 모두 보상해줘야 한다는 입장이다.
앞서 반올림과 삼성전자는 2007년 故 황유미씨가 숨을 거두고 아버지 황상기 씨가 삼성전자에 맞선 지 6년만인 지난해 처음으로 본교섭을 시작했다. 몇 년간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반올림-삼성전자 간 완전한 의견 합의가 차일피일 미뤄지자 결국 일부 유가족들은 삼성직업병 가족대책위원회’를 따로 만들었고, 현재 협상은 삼성전자, 반올림, 가족위 3파전 양상이다.
이와 관련해 황상기 씨는 “속상하지만 그 가족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한다. 다만 삼성이 원하는 대로 흘러간다고 있다는 점이 정말 안타깝다”며 “삼성은 교묘하고 악랄하게 가족들을 지치게 만들었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고 말했다.
또 황 씨는 “삼성은 처음에는 이달 까진 보상을 해주고 싶다더니 이후 올해 안까지는 보상을 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러다가 또 구정까지는 보상을 해주고 싶다고 되풀이 했다”며 “가족들의 마음은 점점 더 애가 타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조바심이 생겼다”고 토로했다.
한편, 삼성전자는 조정위 권고안이 나오기 전까지는 어떤 구체적인 언급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에 조정안에서 피해자와 유족들의 의견이 얼마나 추가적으로 더 반영될 수 있을지는 오는 6월 조정위의 권고안을 통해서 확인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시사포커스 / 진민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