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일 대법관 출신 김지형 조정위원장은 서울 충정로 법무법인 지평에서 삼성전자와 삼성직업병가족대책위원회(가족위),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등 3곳의 협상주체와 만나 이 같은 내용의 조정권고안을 밝혔다.
김 조정위원장은 “공익법인은 권고안에서 제안하는 여러 공익목적을 추구하는 사회적 기구”라면서 “이 법인은 조정권고안에서 정한 원칙과 기준을 준수하고 보상과 대책과 관련한 조정위원의 권고를 수행하도록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조정위는 3곳의 협상주체에 사단법인 형태의 공익법인을 설립할 것을 제안했다. 삼성전자 등의 기부금은 일단 협회에 신탁한 뒤, 이 중 70%는 보상사업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나머지 30%는 공익법인의 고유재산으로 이관 받아 관리하게 된다. 법인의 발기인은 조정위가 법률가단체, 시민사회단체, 산업안전보건 전문가 단체 등 7곳으로부터 한명씩 추천받아 구성된다. 공익법인 발기인들은 조정위가 보상 및 대책과 관련해 제시한 기준을 지키면서 세부 사업을 시행하게 된다.
또 협상주체 간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직업병 보상 대상’의 경우 조정위는 학계 연구결과와 역학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2011년 1월 1일 이전에 삼성전자 반도체와 LCD 사업장에서 작업 공정을 하거나 관련시설 설치 및 수리 등의 업무를 한 사람으로 제한했다.
조정위는 “보상의 개념을 국어사전적 의미로 파악해서는 안되고 사회 구조적 차원에서 해결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라며 “사과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 사회에 천명할 그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며 노동건강인권선언 발표를 제안했다.
이어 조정위는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일하는 현장에서 건강하게 지켜나가는 것은 국민의 한명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기본적 인권이다. 사회적 사과와 더불어 불행을 겪은 개개인에 대한 사과도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정위에 따르면 공익법인은 먼저 올해 말까지 직업병 보상 문제를 신청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심사를 진행한 뒤 보상 여부를 결정하고, 내년 1월 말까지 보상금을 지급한다. 1차 보상이 끝나면 다시 내년 1월1일부터 보상을 신청한 대상자들을 심사한다.
이외 김 조정위원장은 삼성전자에 조정위는 삼성전자 등 반도체 사업체들이 회원으로 있는 한국반도체산업협회에게도 소정의 금액을 기부하도록 권고했다.
당초 중재안은 6월 중순께 발표될 예정이었지만 예상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조정위는 지난달 말에서 이달 초 삼성전자와 삼성직업병피해자가족대책위원회(가족위), 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반올림)를 대상으로 개별면담을 진행한 후 입장 조율을 마친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지난해 5월 14일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이 반도체 사업장에서 일하던 직원 중 일부가 백혈병 등 난치병을 얻은 뒤 사망한 일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당사자와 가족에게 합당한 보상 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 8년간 ‘계란으로 바위치기’
‘반올림’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라는 단체의 시작은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던 故 황유미씨가 2007년 3월 6일 백혈병으로 사망한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부터였다.
이 해 11월 각계 시민사회 단체와 노동단체들이 힘을 합쳐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 규병과 노동 기본권 확보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만들었고 다음 해 2월 지금의 ‘반올림’으로 이름을 바꿔 활동을 본격화 했다.
이후 많은 피해자 및 유가족이 반올림과 함께하기 시작했고, 집단 산재신청과 행정소송, 기자회견 등으로 문제제기를 이어갔다. 이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사망한 故 황유미 씨와 故 이숙영 씨의 산재가 지난해 사망한지 7년의 시간이 지나서야 최종 인정됐다.
강원도 속초에서 택시운전을 하던 故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는 딸의 죽은 후 8년간 삼성전자와 싸워왔다. 딸이 어떤 물질 때문에 왜 죽어야 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어달라는 것과 제 2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 아버지 황 씨가 끊임없이 요구해온 부분이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피해자들을 산재처리해주는 등 금전적 보상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으면서도 반도체 근무 환경과 백혈병의 과학적 인과 관계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근본적인 문제 해결책은 내놓지 않았다.
◆ “故 조은주, 제2의 황유미” 개탄도
이 와중에 故 황유미씨의 8주기를 앞두고 지난달 2월 10일 삼성전자에서 일하던 故 조은주 씨가 입사 3년 만에 골수이형성증후군(혈액암)으로 숨을 거뒀다.
2010년 7월 삼성전자 천안사업장에 입사한 조 씨는 대형 LCD TV 불량검사 작업을 통해 선별된 불량품들을 약품으로 닦아내는 일을 담당했다. 유가족에 따르면 조 씨는 입사 이후 줄곧 과다 업무 등에 시달렸고, 입사한지 3년만인 2013년 9월 근무 중 고열과 입술 파래짐, 피부 발진 등 이상 증상을 보여 병원을 찾은 뒤 혈액암 진단을 받았다. 이후 항암치료를 받아오다 병세가 급격하게 악화돼 골수 이식을 앞두고 숨을 거뒀다.
이에 지난 2월 16일 반올림은 보도자료를 통해 조 씨의 사망을 알리면서 “8년 전 세상을 떠난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망노동자 고(故) 황유미 씨와 똑같은 죽음이 8년 동안 이어져 왔고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현실이 너무 개탄스럽다”고 말했다.
당시 반올림은 조 씨가 삼성전자로부터 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 확답할 수 없다고 언급했다. 조 씨는 병원에서 검사를 받을 때마다 골수이형성증후군, 혈구탐식성림프조직구증 등 다른 결과를 통보 받았는데, 이것은 삼성전자가 보상 질병목록에 골수이형성증후군은 포함시키고 있지만 혈구탐식성림프조직구증은 넣지 않은 것에 걸리는 부분이었다.
이와 관련해 반올림 관계자는 “삼성전자는 보상 대상 질병을 굉장히 협소하게 정해서 같은 계통이지만 약간의 차이로 어떤 질병은 보상 대상에서 제외 된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지적에 삼성전자는 지난 1월 협상에서 뇌종양과 유방암 포함, 백혈병, 비호지킨림프종, 재생불량성빈혈, 다발성골수종 등 모든 종류의 혈액암을 보상 대상으로 삼겠다고 발표했다.
◆ 3파전 양상의 기원
앞서 반올림과 삼성전자의 본교섭은 2007년 故 황유미씨가 숨을 거두고 아버지 황상기 씨가 삼성전자에 맞선 지 6년만인 지난해 처음으로 시작됐다. 몇 년간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반올림-삼성전자 간 완전한 의견 합의가 차일피일 미뤄지자 결국 일부 유가족들은 반올림에서 나와 삼성직업병 가족대책위원회’를 따로 만들었고, 따라서 협상 주체는 삼성전자, 반올림, 가족위 세 곳으로 나눠졌다.
이와 관련해 당시 황 씨는 “속상하지만 그 가족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한다. 다만 삼성이 원하는 대로 흘러간다고 있다는 점이 정말 안타깝다”며 “삼성은 교묘하고 악랄하게 가족들을 지치게 만들었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고 말했다. 또 황 씨는 “삼성은 처음에는 이달 까진 보상을 해주고 싶다더니 이후 올해 안까지는 보상을 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러다가 또 구정까지는 보상을 해주고 싶다고 되풀이 했다”며 “가족들의 마음은 점점 더 애가 타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조바심이 생겼다”고 토로했다.[시사포커스 / 진민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