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헌법재판소는 21일 1970년대 유신헌법 53조와 긴급조치 1·2·9호에 대한 헌법소원심판 청구사건에서 긴급조치 1·2·9호에 대해서만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모두 헌법에 어긋난다고 결정했다.
유신헌법 53조에 관해서는 "긴급조치를 발령할 수 있는 근거규정이 되었을 뿐"이라며 "긴급조치의 위헌성만 확인한다"고 판단해 위헌 여부를 따지지 않았다.
이날 선고는 전체 9명의 재판관 중 송두환 헌재소장 권한대행 등 8명만 참여했다. 위헌 결정을 하려면 재판관 6인 이상이 찬성하면 된다.
이번 결정은 지난 1974년 정부시책을 비판했다가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옥고를 치른 오종상씨(72) 등 6명이 헌법소원을 청구한 지 3년 만에 이뤄졌다.
1974년 1월8일에 발동된 긴급조치 1·2호는 유신헌법 비방과 유언비어 날조·유포를 금지하고 긴급조치 위반사건을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75년 5월13일 발동된 긴급조치 9호는 집회·시위 또는 신문·방송 기타 통신에 의해 헌법을 부정하거나 폐지를 청원·선포하는 행위 등 정치활동을 금지했다.
헌재는 "해당 조항은 자유민주주의 질서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기본권을 제한하기 위한 입법목적의 정당성과 방법의 적절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국가 기본권 제한은 법치주의 질서와 정상적인 헌법 보장 아래서 불가능한 전쟁과 천재지변 하에서만 행사될 수 있다"며 "국가긴급권이 갖는 내재적 한계를 일탈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따라서 헌재는 "긴급조치 1·2·9호는 죄형법정주의에 위배된다"며 "참정권, 표현의 자유, 영장주의 및 신체의 자유, 재판을 받을 권리 등 기본권을 지나치게 제한하거나 침해한다"고 결정했다.
또 "긴급조치에 대한 위헌성을 심사하는 준거규범은 유신헌법이 아니라 현행헌법"이라며 "헌법으로서의 규범적 효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오로지 현행 헌법이다"라고 판단했다.
아울러 "유신헌법 일부조항, 긴급조치 등이 기본권을 과도하게 침해하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훼손한다는 반성에 기초해 헌법 개정을 결단한 국민의 의사와 헌법의 역사상에 반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헌재가 판단을 하지 않은 유신헌법 53조는 대통령이 위기라고 판단하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긴급조치를 내릴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특히 유신헌법 53조 4항은 '긴급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당시 헌법을 준거기준으로 삼을 경우 긴급조치의 위헌여부가 달라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유신헌법 53조와 긴급조치는 박정희 정권의 비민주성을 상징하는 조치로 여겨져 왔다.
앞서 대법원은 오씨의 재심사건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내리면서 긴급조치 1호에 대해 직권으로 위헌판단을 내린 바 있다.
대법원은 당시 긴급조치를 법률이 아닌 명령으로 보고 위헌으로 판단했다. 법률의 위헌심판권은 헌재가 갖지만 명령·규칙·처분의 심판권은 대법원이 갖기 때문이다.
헌재는 이와 관련해 "헌법소원 대상이 되는 '법률'여부는 그 규범의 효력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전제한 뒤 "긴급조치는 법률과 동일한 효력을 가진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 긴급조치는 유신헌법 53조에 근거해 헌법과 동일한 효력으로는 보기 어렵지만 기본권 제한, 처벌 규정, 영장주의 등에 대한 특별규정 등을 두고 있어 법률과는 효력이 같다"고 부연했다.
헌재는 또 "대법원 판결은 대세적 효력이 없지만 헌재의 위헌 결정은 대세적 기속력을 가진다"며 "긴급조치에 대해 적극적으로 위헌여부를 따지는 것은 헌재의 존재이유에도 부합한다"고 설명했다.
헌재 관계자는 "이번 위헌 결정으로 과거 유신체제에서 선포된 긴급조치 1·2·9호 위반으로 처벌받은 많은 사람들이 재심소송을 통해 일괄적으로 권리구제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