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반납해 회사 살리니 투기자본 놀이터 됐다”

22일 업계에 따르면 전날 여의도 한국증권거래소 앞에서는 현대페인트 노조와 임직원들이 현수막과 피켓을 들고 현대페인트의 상장 폐지를 요구하는 이색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화학섬유노조 및 현대페인트 노조, 현대페인트 경영정상화를 위한 전 임직원 비상대책위원회는 ‘무자본 M&A’와 투기자본 근절을 위한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먹튀자본 반대! 노동생존권 사수! 소액투자자 보호!” 등을 요구했다.
이날 현대페인트 노조는 투기자본이 무자본 M&A로 이득을 챙기는 동안 노동자와 일반투자자들이 피해와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규탄하고 실제 한국거래소 측에 상장폐지 신청서를 제출했다. 또한 나상대 노조위원장은 이날 총파업을 선언했다.
◆잦은 대주주 변경 과정서 먹튀 논란
노조와 임직원들이 뭉쳐 자사의 상장폐지까지 요청하게 된 배경은 최근 수 년간 대주주가 잇따라 바뀌는 과정에서 불거졌던 먹튀 논란 등에서 비롯된다.
현대페인트는 창립된지 50여년이 넘은 페인트 업계의 터줏대감이다. 지난 1960년 도료의 제조와 판매, 화학약품 매매를 목적으로 설립됐으며 1989년 최초로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됐다.
하지만 상장 이후 경영진들은 잇따라 투기를 일삼는 것은 물론 외형 불리기와 지급보증에 치중, 본업인 페인트를 소홀히 했다. 이는 결국 1998년 부도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회생 후 현대페인트는 대주주들이 자주 바뀌는 부침을 겪었다. 노조는 바뀐 대주주들이 한결같이 자산매각 및 주식 시세차익을 이용해 수익을 남기고 팔기를 거듭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전에는 최규선 회장이 지배주주인 유아이에너지가 현대페인트의 최대주주였다. 하지만 최규선 회장의 횡령·배임 혐의가 발생해 유아이에너지가 상장폐지됐고 현대페인트도 자본잠식이 50%를 초과해 상장폐지 위기에 빠졌다.
파산 위기까지 몰렸던 현대페인트는 2013년 5월 회생절차에 들어갔다. 이후 인수합병과 보유자산 매각 등을 이행한 현대페인트는 자금조달을 위한 감자 및 유상증자를 이어가며 최대주주가 잇따라 변경됐다. 유아이에너지에서 토마토2저축은행으로, JTC로 이어졌다.
지난 3월 당시 최대주주이던 일본계 기업 JTC는 회생절차에 있던 현대페인트를 싼 가격에 인수해 보호예수가 풀리자마자 지엔에이치에 경영권을 매각하고 1년여 만에 165억원의 차익을 남겼다. JTC는 면세점업과 화장품제조·판매업을 하는 일본 기업으로 일본에서 사업을 하는 구철모 회장이 지분 100%를 가진 회사다.

문제는 일련의 회생 과정 및 감자, 유증이 반복되면서 주가가 널뛰기 장세를 반복했다는 점이다.
2013년 6800원에 매매거래가 정지됐던 현대페인트는 매매 재개 직후 연일 가격제한폭까지 치솟으면서 2주 만에 8000원까지 급등했지만, 거래 재개 호재가 소멸된 이후 폭락해 3000원대로 주저앉았다. 올해 초에는 1900원대까지 밀려났다가 최대주주 변경 소식이 전해지자 상한가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22일 현재 현대페인트 주가는 1620원에 그쳤다.
이마저도 최근 전해진 유상증자 소식에 반등한 수준이다. 지난 15일 현대페인트는 운영자금 조달을 위해 대표집행임원인 김준남 씨를 대상으로 약 40억원 규모의 제3자배정 유상증자를 결정했다고 공시한 바 있다. 이처럼 주가가 수 년여 동안 널뛰기를 거듭하면서 소액주주들이 극심한 혼란을 겪었음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지난 11월에는 현대페인트의 전 대표와 현직 증권사 직원에 증권방송 진행자까지 가세한 주가조작 사건이 적발되기까지 했다.
검찰에 따르면 현대페인트 전 대표이자 최대주주인 이모 씨와 현대페인트 공동인수자 김모 씨는 시세조종과 부정거래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현직 증권방송 진행자는 대가를 받고 올해 7월까지 방송에서 현대페인트 종목을 추천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밖에 고객 계좌로 현대페인트 주식을 매수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1000만~2000만원을 수수한 증권사 직원 4명이 추가로 불구속기소됐다.
이 전 대표와 김 씨를 비롯한 시세조종꾼 일당은 무자본 인수합병(M&A)으로 이전 최대주주에게서 인수한 주식을 두 배 이상 가격에 처분하기 위해 시세를 조종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지분변경 공시를 누락하고 상당수 지분을 처분해 200억원에 달하는 부당이득을 취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지경까지 갈 거면 상장을 폐지하라”
이날 현대페인트 임직원들의 외침도 이 같은 일련의 사건들과 맞닿아 있다. 특히 회생 과정에서 임금을 반납하고 사내 복지를 후퇴시키는 자구안을 감내해 왔던 임직원들로서는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회사를 인수한 투기자본이 회사의 경쟁력을 키우기는커녕 회사를 가지고 주가조작을 일삼는 행태에 참담한 심정에 빠진 분위기다.
이날 화학섬유노조 나상대 지회장은 한국거래소가 블록딜(시간외대량매매)과 관련된 감시를 게을리했다고 항의하고 공장이 투기자본의 놀이터가 돼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김창곤 민주노총 인천지역본부장은 임직원들이 임금과 복지를 반납하며 회사를 살리니 다른 투기자본이 들어와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일침을 가하며 “이 지경까지 갈 거면 상장을 폐지하는 게 임직원, 노동자들이 함께 사는 길”이라고 호소했다.
주식으로만 이익을 챙기는 투기자본을 배제하고 페인트사업에 전념할 새로운 투자자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그간 서너 차례에 걸쳐 투기자본으로 인해 빠져나간 돈만 1000억원이 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들은 “현대페인트 전 임직원의 소원은 정상적인 투자와 경영을 통해 회사가 발전하고 노력하는 만큼 살아가는 것”이라며 “투기자본을 끝장낼 때까지 20년이고 200년이고 싸우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시사포커스 / 김종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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